이상, <시와 소설 편집후기>, 1936.3.
# 원문
이상, <시와 소설 편집후기>
전부터 몇 번 궁리가 있었으나 여의치 못해 그럭저럭 해 오던 일이 이렇게 탁방이 나서 회원들은 모두 기뻐한다. 위선 화우 구본웅 씨에게 마음으로 치사해야 한다. 쓰고 싶은 것을 써라 책을랑 내 만들어 주마 해서 세상에 흔히 있는 별별 글탄 하나 겪지 않고 깨끗이 탄생했다. 일후도 딴 걱정 없을 것은 물론이다. 깨끗하다니 말이지 겉표지에서 뒤표지까지 예서 더 더할 수 있으랴. 보면 알 게다.
구인회처럼 탈 많을 수 참 없다. 그러나 한 번도 대꾸를 한 일이 없는 것은 말하자면 그런 대꾸 일일이 하느니 할 일이 따로 많으니까다. 일후라도 묵묵부답 채 지날 게다.
어쩌다 예회라고 모이면 출석보다 결석이 더 많으니 변변이 이야기도 다 못하고 흐지부지 헤어지곤 하는 수가 많다. 게으른 탓이겠지만 또 다 각각 매인 일이 있고 역시 그도 그럴 수밖에 없다고 해서 회원을 너무 동떨어지지 않는 한에 맞아 보자고 꽤 오래전부터 말이 있어 왔는데 그도 또 자연 허명무실해 오던 차에 이번 기회에 김유정, 김환태 두 군을 맞았으니 퍽 좋다. 두 군은 전부터 회원들과 친분이 없지 않던 차에 잘됐다.
차차 페이지도 늘릴 작정이다. 회원 밖의 분 것도 물론 실린다. 지면 벼르는 것은 의논껏 하고 편집만 인쇄소 관계상 이상이 맡아 보기로 한다. 그것도 역 의논 후 일이지만.
지난달에 태원(泰遠)이 첫 따님을 낳았다. 아주 귀얘 죽겠단다. 명명(命名) 왈(曰) '설영(雪英)'ㅡ 장래 기가 막힌 모던 걸로 꾸미리라는 부친 태원의 원대한 기업이다.
시와 소설에 대한 일체 통신은 창문사 출판부 이상한테 하면 된다.
# 현대어 변환
이상, <시와 소설 편집후기>
예전부터 여러 번 책을 내려고 계획했지만 여건이 맞지 않아 계속 미뤄져 왔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마침내 출판이 성사되어 회원 모두가 매우 기뻐하고 있습니다.
특히 화가 구본웅 씨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는 "쓰고 싶은 글을 마음껏 쓰세요. 책은 내가 만들어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덕분에 세상에서 흔히 겪는 여러 가지 출판상의 어려움이나 간섭 없이 이 책은 깨끗하게 세상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다른 걱정은 없을 것입니다.
'깨끗하다'는 말은 내용뿐 아니라 책의 겉모습까지 포함한 말입니다. 표지에서 뒤표지까지 더 바랄 것이 없을 만큼 만족스럽습니다. 직접 보시면 아실 것입니다.
구인회는 참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모임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한 번도 그런 말들에 일일이 대응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 일에 시간을 쓰기보다 해야 할 일이 훨씬 많기 때문입니다. 앞으로도 묵묵히 아무 대꾸 없이 우리의 길을 갈 생각입니다.
가끔 정기 모임을 열어도 참석자보다 결석자가 더 많아 제대로 이야기도 나누지 못한 채 흐지부지 헤어질 때가 많았습니다. 모두 조금 게으른 탓도 있지만, 각자 맡은 일이 있어 어쩔 수 없는 면도 있습니다.
그래도 서로 너무 멀어지지는 말자는 이야기가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그것 역시 흐지부지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던 차에 이번 기회에 김유정 군과 김환태 군이 새 회원으로 함께하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두 사람은 원래 회원들과도 친분이 있었기에 더욱 반가운 일입니다.
앞으로는 잡지의 분량도 조금씩 늘려 갈 계획입니다. 회원이 아닌 분들의 작품도 물론 실을 예정입니다. 어떤 작품을 게재할지는 함께 의논하여 결정하고, 편집과 인쇄에 관한 실무는 인쇄소와의 관계상 제가 맡기로 했습니다. 물론 이것도 회원들과 상의한 뒤에 진행할 일입니다.
지난달에는 태원이 첫딸을 얻었습니다. 너무나 예뻐서 어쩔 줄 모르고 있습니다. 이름은 '설영'이라고 지었습니다. 장차 아주 멋진 모던 걸로 키우겠다는 것이 아버지 태원의 원대한 꿈이라고 합니다.
〈시와 소설〉에 관한 모든 연락은 창문사 출판부의 이상 앞으로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perspectives>
# 1. 문학적 관점
## 1. 핵심 주장
이 글은 단순한 창간 공지나 편집 후기라기보다 '문학은 외부의 간섭 없이 자유롭게 창작되어야 한다'는 문학적 선언이다.
이상은 작품의 내용보다 먼저 창작할 수 있는 환경 자체를 이야기한다. 이는 문학의 본질이 작가의 자유로운 사유와 표현에 있다는 그의 신념을 드러낸다.
또한 이 글은 개인의 창작을 넘어 문학 공동체가 서로 신뢰하며 자유롭게 창작하는 공간을 만들겠다는 선언문으로도 읽을 수 있다.
## 2. 근거가 되는 문장
> "쓰고 싶은 것을 써라. 책을랑 내 만들어 주마."
이 문장은 단순한 출판 제안이 아니다.
창작자는 표현에만 집중하고, 출판자는 그 자유를 보장하겠다는 약속이다.
오늘날의 표현으로 바꾸면
> "창작에는 간섭하지 않겠다."
라는 의미에 가깝다.
또한,
> "세상에 흔히 있는 별별 글탄 하나 겪지 않고 깨끗이 탄생했다."
에서 '글탄'은 출판 과정에서 흔히 발생하는 간섭, 수정 요구, 이해관계, 잡음 등을 의미한다.
'깨끗이 탄생했다'는 표현은 단순히 책이 잘 인쇄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 창작자의 의도가 훼손되지 않았고
* 외부 권력의 개입이 최소화되었으며
* 작품이 본래의 모습 그대로 세상에 나왔다는 자부심을 담고 있다.
이어지는
> "깨끗하다니 말이지. 겉표지에서 뒤표지까지."
라는 문장은 진지한 선언 뒤에 특유의 유머를 섞어 독자와의 긴장을 풀어 주는 이상의 문체적 특징을 보여 준다.
## 3. 당시 시대와의 관계
1936년은 일제강점기 중에서도 사상과 출판에 대한 통제가 점차 강화되던 시기였다.
문학은 단순한 예술 활동이 아니라 식민지 현실 속에서 끊임없이 검열과 자기검열을 의식해야 하는 영역이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면,
> "깨끗이 탄생했다."
는 말은 단순한 출판 성공을 넘어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 창작 과정이 비교적 자유로웠다.
* 불필요한 간섭 없이 책을 낼 수 있었다.
* 동인들의 의도가 온전히 담긴 결과물이었다.
또한 당시 많은 동인지가 재정 문제나 출판사의 사정으로 좌절되었던 현실을 생각하면, 이 글은 문학 공동체가 스스로의 힘으로 작품을 세상에 내놓았다는 성취감도 함께 표현하고 있다.
## 4. 문학사적 의미
이 글은 한국 근대문학에서 중요한 흐름 중 하나인 동인지 문화를 잘 보여 준다.
동인지는 상업적 성공보다 문학적 실험과 새로운 표현을 위한 공간이었다.
이상이 말하는 자유는 단순히 검열의 부재가 아니라,
* 새로운 문체를 실험할 자유
* 기존 문학 형식을 넘어설 자유
* 문학적 실패조차 허용되는 자유
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 글은 하나의 창간사가 아니라 근대 문학이 스스로의 독립성을 확보하려는 과정을 보여 주는 기록으로도 읽을 수 있다.
## 5. 표현 기법
이 글은 공지문임에도 일반적인 공문체를 사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독자에게 말을 거는 듯한 구어체를 적극 활용한다.
예를 들어,
> "보면 알 게다."
> "말이지."
와 같은 표현은 편집자가 독자와 대화하는 느낌을 준다.
또한
진지한 선언 → 농담 → 공지 → 사적인 이야기
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구성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실험적인 산문 형식이다.
이러한 자유로운 문체는 내용에서 주장하는 '창작의 자유'를 형식에서도 실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글의 내용과 글의 형식이 서로 같은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 6. 현대 사회에서의 해석
오늘날 이 글은 다음과 같은 상황과 매우 닮아 있다.
* 투자자의 간섭 없이 스타트업을 출시한 창업자의 글
* 오픈소스 프로젝트의 첫 릴리스 노트
* 독립출판 창간사
* 개인 창작 플랫폼의 서비스 오픈 공지
즉,
> "우리가 만들고 싶은 것을 우리의 방식대로 만들었다."
라는 창작자의 선언이다.
또한 최근의 크리에이터 경제나 1인 출판 문화에서도 "창작자의 자율성"은 중요한 가치로 여겨진다. 이런 점에서 이 글은 오늘날에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 7. 반대 관점
다른 시각에서는 이 글을 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다.
첫째, 문학 자체보다 출판 과정에 지나치게 많은 의미를 부여했다고 볼 수 있다.
둘째, "간섭이 없었다"는 사실이 곧 문학적 완성도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자유로운 창작은 중요하지만, 작품에 대한 비평과 토론 역시 문학 발전에 필수적이라는 반론이 가능하다.
셋째, 동인 중심의 출판은 자유를 보장하는 장점이 있는 반면, 외부의 비판과 다양한 시각이 부족해질 위험도 있다. 자유로운 공동체가 때로는 내부의 공감대에 머물러 자기 검증이 약해질 수 있다는 지적도 가능하다.
## 8. 종합 해석
이 글은 표면적으로는 『시와 소설』의 창간을 알리는 편집자의 인사말이지만, 그 이면에는 이상의 문학관이 담겨 있다.
그에게 문학은 단순히 작품을 쓰는 행위가 아니라 자유로운 창작 환경 속에서 신뢰하는 동료들과 함께 새로운 표현을 실험하는 과정이었다.
'깨끗이 탄생했다'는 표현은 단순히 한 권의 책이 출판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창작자의 의도가 훼손되지 않은 상태로 세상과 만났다는 기쁨, 그리고 문학은 권위나 간섭보다 자유와 신뢰 위에서 성장해야 한다는 믿음을 압축한 표현이다.
따라서 이 글은 오늘날에도 창작의 자유와 공동체의 가치가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만드는 하나의 문학적 선언으로 읽을 수 있다.
# link:
# ref.: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문학 (Literature) > 한국 수필 (Korean Essay)' 카테고리의 다른 글
| Essay) 이상, <서망율도(西望栗島)> - 이상이 수필로 남긴 절망의 감각 (1) | 2025.12.29 |
|---|---|
| Essay) 이상, <文學을 버리고 文化를想像할수업다> - 문학을 버리는 순간, 우리는 문화를 잃는다. (0) | 2025.12.26 |
| Essay) 이상, <산책의 가을> - 도시가 감정을 대체하는 방식을 기록한 텍스트 (1) | 2025.12.25 |
| Essay) 이상, <혈서삼태(血書三態)>: 피로 쓴 세 가지 맹세, 인간의 진실과 위선 (0) | 2025.04.22 |
| Essay) 이상, <산촌여정> (8) | 2024.12.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