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록담의 노래>
1장: 끝나지 않는 어둠 속으로
비 오는 늦여름 저녁, 제주도의 한적한 주택. 서윤은 작고 어두운 다락방에 홀로 앉아 딸이 생전에 그린 그림들을 하나씩 펼쳐본다. 노란 해와 푸른 백록담이 그려진 한 장의 그림에서 손길이 멈춘다. 그녀의 손이 떨리고, 눈에 고인 눈물이 종이 위로 떨어진다.
5년 전 교통사고가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 서윤은 사랑하는 남편과 딸을 잃었고, 자신은 살아남았다. 그 사실은 그녀를 매일 고문했다. "왜 하필 나만?"이라는 질문은 하루도 빠짐없이 그녀를 옭아맸고, 삶의 의욕은 고갈된 지 오래다. 그녀는 심리 치료사였지만, 이제는 자신의 감정을 관리할 능력조차 없었다.
탁자 위에 놓인 한라산 백록담 사진이 그녀의 시선을 잡아끈다. 사진 속 백록담의 물은 눈부시게 푸르고, 그곳에서 찍힌 가족 사진 속 그녀는 활짝 웃고 있었다. 그녀는 사진을 가방에 넣으며 속삭인다.
"마지막으로 그곳에 가자. 모든 걸 끝내러."
2장: 산으로 가는 이유
한라산 아래의 작은 마을. 산악 가이드 사무실에서 현욱은 장비를 정리하며 흩어진 마음을 다잡고 있다. 그는 고독한 산악인이었다. 7년 전, 산사태로 동료들을 잃었던 그는 지금까지도 그 책임감에 짓눌려 있었다. 매일 밤 사고의 기억이 되살아났고, 그는 자신이 다른 이의 생명을 지킬 자격이 없다고 믿었다. 그래서 오랜 시간 혼자 산을 올랐다.
그런 그에게 서윤의 친구로부터 의뢰가 들어왔다. "한 여자가 백록담을 오르겠다고 합니다. 그녀가 안전하게 산을 내려올 수 있도록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현욱은 처음에는 그 요청을 거절했다. 산은 누군가를 치유할 수도 있지만, 누군가를 삼켜버릴 수도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무언가 서윤의 이야기가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그녀의 슬픔은 나와 비슷할지도 몰라.’ 그는 결국 그 여정을 함께하기로 결심한다.
3장: 백록담으로 향하는 첫걸음
등산로 입구에서 처음 만난 서윤과 현욱. 서윤은 배낭을 맨 채 어깨를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 현욱은 그녀에게 다가가 간단히 자신을 소개했지만, 서윤의 반응은 차가웠다. 그녀는 마치 모든 것에서 도망치고 싶은 사람처럼 보였다.
산을 오르는 초반은 조용했다. 서윤은 말을 거의 하지 않았고, 현욱 역시 억지로 대화를 시도하지 않았다. 숲길의 바람 소리와 새들의 울음이 유일한 대화였다. 그러나 점차 주변 풍경이 두 사람의 무거운 마음을 침묵 속에서 이완시키기 시작했다. 서윤은 오래된 바위 틈에서 피어난 작은 들꽃을 바라보며 문득 중얼거렸다.
"어떻게 이런 곳에서 자랄 수 있을까요?"
현욱은 그녀의 말을 듣고 잠시 멈춰 섰다. "산은 죽음과 삶이 함께 있는 곳이니까요. 어디서든 자랄 수 있죠."
하지만 서윤의 눈빛은 여전히 공허했다. 현욱은 그녀가 자신과 닮아 있다는 걸 느꼈다. 아무리 산의 풍경이 아름다워도, 마음이 무너지면 그것조차 위안이 되지 않는다.
4장: 폭풍 속의 진실
산 중턱에 도달했을 때, 하늘이 갑자기 흐려졌다. 빗방울이 떨어지더니 이내 거센 폭우가 몰아쳤다. 두 사람은 급히 근처의 나무 아래에서 비를 피했지만, 안개와 비 때문에 등산로는 보이지 않게 되었다.
서윤은 비틀거리며 길을 잃기 시작했다. 그녀는 안개 속에서 서성이다 발을 헛디뎠고, 현욱이 그녀를 간신히 붙잡았다. "조심하세요!" 현욱의 목소리가 크게 울렸지만, 서윤은 눈물을 터뜨리며 소리쳤다.
"조심해서 뭘 하라는 거예요? 난 어차피 죽으려고 온 거예요!"
현욱은 그 말을 듣고 잠시 숨을 고르며 그녀를 바라봤다. 그는 서윤의 손을 놓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 "죽고 싶으면 혼자 죽으세요. 하지만 나를 끌어들이진 마세요."
그의 말은 차가웠지만, 서윤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작은 파장을 일으켰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멀리서 희미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은 그 소리를 따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5장: 길을 잃은 존재들
짙은 안개 속에서 두 사람은 어린 사슴 소하를 발견한다. 소하는 홀로 숲을 헤매고 있었다. 그의 작은 몸이 비에 젖어 떨고 있었다. 서윤은 본능적으로 소하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소하는 경계하며 멀찍이 물러섰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소하는 두 사람을 따라오기 시작했다. 마치 그들을 어디론가 안내하려는 것처럼. 현욱은 "사슴을 따라가는 게 위험할 수 있어요,"라고 말했지만, 서윤은 단호히 대답했다. "우리도 길을 잃었잖아요. 그 애를 믿어봐요."
소하는 낭떠러지가 있는 길을 피해 안전한 경로로 두 사람을 이끌었다. 그 과정에서 서윤은 자연스레 소하를 보살피는 자신을 발견했다. "어쩌면 얘도 우리처럼 길을 잃은 걸지도 몰라요," 그녀는 속삭였다.
6장: 백록담의 비밀
소하를 따라가며 두 사람은 마침내 백록담 정상에 도달했다. 비는 그쳤고, 안개가 걷히면서 푸른 호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곳은 현실이 아닌 다른 세계처럼 보였다. 서윤은 백록담의 물가에 앉아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마침내 자신의 마음을 열었다. "나는 딸과 남편을 죽게 했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조금만 더 조심했더라면,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
현욱은 그녀를 바라보며 자신 역시 비슷한 죄책감을 느꼈음을 털어놓았다. "나도 동료들을 구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그들이 원했던 건 내가 살아남아 지금이라도 나를 용서하는 거였겠죠."
서윤은 백록담의 잔잔한 물결을 바라보며 속삭였다. "그들도 나에게 그런 말을 하고 있었을까요?"
7장: 백록담의 비밀
백록담에 도달한 두 사람은 숨이 멎을 듯한 풍경 앞에 멈춰 섰다. 하늘과 맞닿은 듯한 푸른 호수는 고요했고, 주변은 빽빽한 안개로 둘러싸여 있었다. 마치 세상의 끝에 선 것처럼 현실의 소음은 사라지고, 오직 자연의 숨소리만이 두 사람을 감쌌다.
서윤은 천천히 호수 가장자리로 다가갔다. 잔잔한 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며 그녀는 오래도록 억눌러 온 감정을 터뜨렸다. 무겁게 숨을 몰아쉬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매일 그들을 떠올렸어요. 남편과 딸. 그날 내가 운전대를 조금만 더 빨리 돌렸다면... 아니면 조금만 더 천천히 갔더라면... 그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을 거예요."
현욱은 그녀의 곁에 앉았다. 잠시 침묵하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나도 산에서 동료들을 잃었어요. 내가 선택한 길이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고 생각했죠. 그때부터 산을 벗어나지 못했어요. 내 책임을 무겁게 짊어진 채 여기까지 왔지만... 이곳에 와서 깨달았어요. 그들은 내가 계속 살아가길 바랐을 겁니다. 죽음의 무게를 이겨내고, 새로운 길을 찾으라고."
서윤은 그의 말을 들으며 호수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눈을 떼지 못했다. 그녀의 눈물은 백록담의 물속으로 흘러들어 갔다.
"그들도 나에게 그렇게 말하고 있었을까요? 살아가라고... 나를 용서하라고..."
현욱은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때 소하가 천천히 다가와 두 사람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어린 사슴은 호수의 물을 잠시 바라보더니, 다시 고개를 들어 두 사람을 응시했다. 그 순간, 서윤은 알 수 없는 평온함이 그녀의 마음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마치 자연이 말없이 그녀를 위로하는 듯했다.
8장: 내려가는 길
백록담에서의 시간이 지나고, 두 사람은 하산을 준비했다. 소하는 여전히 그들의 곁에 있었다. 산 아래로 내려가는 길은 오르막과는 달랐다. 태양이 안개를 밀어내며 빛을 드리우기 시작했고, 새들의 노래가 숲을 채웠다.
내려가는 동안 서윤은 입을 열었다.
"나도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해볼게요. 이 산에서 뭔가를 버리고 간다면, 새로운 무언가를 가져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현욱은 그녀를 보며 미소 지었다.
"산은 언제나 그런 곳이에요. 잃고, 찾고, 다시 시작하는 곳."
길 끝에서 소하가 멈춰 섰다. 서윤과 현욱이 발걸음을 멈추자, 소하는 천천히 몸을 돌려 숲 속으로 사라졌다. 마치 자신이 할 일을 다 끝냈다는 듯이.
서윤은 소하가 사라지는 방향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그 아이는 우리를 구했어요. 길을 보여주고, 우리가 스스로를 찾게 했죠."
현욱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어쩌면 자연이 우리에게 준 선물이었을지도 모르죠. 살아가라는 메시지였을지도."
두 사람은 각자의 길로 돌아가기로 했다. 서윤은 제주에서의 삶을 새로 시작하기로 결심했고, 현욱은 산악 가이드를 계속하되, 더 이상 과거에 얽매이지 않기로 했다.
에필로그
몇 달이 지나 한라산에 눈이 내리는 겨울날. 백록담 근처의 고요한 숲 속, 홀로 서 있는 소하의 모습이 비친다. 여전히 작고 연약한 몸이지만, 소하는 한 발 한 발 숲의 깊은 곳으로 나아간다.
산 아래에서는 서윤이 한라산을 바라보며 미소 짓는다. 그녀의 얼굴은 더 이상 공허하지 않고, 새롭게 빛나고 있었다.
백록담의 물결은 여전히 고요하게 빛나고, 자연은 인간에게 말을 건네듯 신비로운 침묵 속에서 삶의 순환을 이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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