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뱅쇼의 향기 속에서>
1장: 낯선 향기 속으로
눈발이 거리를 덮으며 차가운 도시를 감싸고 있었다. 전기 가로등의 희미한 빛이 눈송이를 반짝이며 투명한 그림자를 만들었다. 바쁜 퇴근길, 거리는 고요했지만 서윤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거센 바람이 코끝을 스쳤지만,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오늘도... 그냥 지나가야지.”
그녀는 버릇처럼 자신에게 말했다. 그동안은 그저 지나쳤던 익숙한 골목. 그러나 오늘, 그녀는 멈춰 섰다.
좁은 골목 끝에 작고 오래된 간판이 보였다. **"뱅쇼의 향기"**라고 적힌 간판이 어딘가 이질적이면서도 끌렸다. 서윤은 왜인지 알 수 없었지만, 발길이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 그녀를 맞이한 것은 따스한 온기와 달콤하면서도 매콤한 뱅쇼의 독특한 향이었다.
“어서 오세요.”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의 주인은 바 뒤에서 와인잔을 닦고 있던 남자였다. 그는 검은 머리에 단정한 모습이었지만, 어디선가 익숙한 느낌을 주었다. 서윤은 그를 보며 눈길을 피했다.
“여기... 처음 오신 거죠?”
그가 말을 걸었다. 서윤은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려 했지만, 어딘가 불편한 감정이 들었다.
“네. 그냥 지나가다 들렀어요.”
그녀는 최대한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나 뱅쇼 냄새는 점점 그녀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어딘가 익숙했다. 하지만 기억 속에서는 도저히 끌어낼 수 없는 감각이었다.
남자는 잔을 내려놓고 작은 미소를 지었다.
“뱅쇼를 한 잔 드려도 될까요? 오늘같이 추운 날엔 꼭 필요하죠.”
서윤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잔에 적포도주를 따르고, 몇 가지 허브와 오렌지 껍질을 섞어 뱅쇼를 준비했다. 냄비에서 김이 오르며 향기가 더욱 짙어졌다.
그녀가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는 순간, 차갑던 몸이 따뜻해졌다. 동시에 기억 속에서 잊혀진 무언가가 깨어나는 듯했다.
눈 속을 걷는 어린 자신, 누군가의 손을 꼭 잡고 있는 느낌. 그리고... 어딘가 익숙한 웃음소리.
그녀는 잔을 내려놓고 숨을 내쉬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 향...” 그녀는 낮게 중얼거렸다.
“익숙한가요?” 남자가 물었다. 그는 서윤의 반응을 마치 기다렸다는 듯 보았다.
서윤은 고개를 저으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네, 그런데...” 말을 잇지 못했다.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그녀는 왜 이 향을 알고 있을까? 그리고 이 낯선 바가 왜 이렇게 익숙할까?
그때 바의 문이 열리며 새로운 손님이 들어섰다. 서윤은 고개를 돌렸다.
“서윤?”
놀란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서윤은 낯익은 얼굴을 마주하며 얼어붙었다. 그녀가 이곳에서 절대 만날 리 없다고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2장: 기억의 실마리
서윤은 숨이 멎은 것처럼 느껴졌다. 눈앞의 남자는 너무나 익숙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왜 그를 기억하지 못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한걸음에 다가와 말을 건넸다.
“서윤, 진짜 너 맞아?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어.”
서윤은 그의 환한 표정과 대비되는 자신의 혼란스러운 감정에 휘청거릴 뻔했다.
“죄송한데, 저희 아는 사이인가요?”
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남자는 잠시 멈칫했다. 놀란 듯 서윤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몰라? 나, 도윤이야. 너 기억 안 나?”
도윤.
그 이름은 그녀의 머릿속에 아무런 울림을 주지 않았다. 하지만 가슴 한구석이 찌릿하게 아파왔다. 그가 누구인지 몰라도 그 이름은 자신에게 중요한 의미가 있을 것 같았다.
바 뒤에 서 있던 재희가 조용히 개입했다.
“두 분, 아는 사이신가 보네요.”
그의 말에는 미묘한 긴장감이 섞여 있었다.
도윤은 재희를 힐끔 보더니 서윤에게 시선을 돌렸다.
“우리 아는 사이 맞지. 너랑 나...”
그는 말을 멈추고 잠시 서윤을 살폈다.
“모르겠어. 너 왜 이렇게 기억을 못 하는 거야?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서윤은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저도 모르겠어요. 사실, 제 기억이... 좀 끊긴 것 같아요.”
도윤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 그는 뭔가를 더 말하려다 입을 다물고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이건... 말로 할 일이 아닌 것 같네. 네가 여기서 뭐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곧 다시 이야기하자.”
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주머니에서 작은 종이를 꺼내 서윤에게 건넸다.
“내 번호야. 꼭 연락해줘. 할 말이 많으니까.”
서윤은 종이를 받아들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은 더 복잡해졌다. 도윤이 떠난 후, 바 안의 공기는 더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 사람, 기억 안 나요?”
재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서윤은 무거운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바라봤다.
“정말로 몰라요. 하지만 이상해요. 그 이름을 들었을 때...”
그녀는 말을 멈추고 잔을 잡았다. 뱅쇼의 향이 다시 코끝을 스쳤고, 잃어버렸던 무언가가 잠깐 떠오를 듯했다.
“무슨 느낌이었어요?” 재희가 물었다.
“슬펐어요.” 서윤은 낮게 속삭였다.
“마치 아주 소중한 걸 잃어버린 것처럼.”
재희는 서윤의 말에 잠시 침묵했다. 그의 눈에는 알 수 없는 감정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는 입을 다물고 그 감정을 감췄다.
서윤은 바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왔지만, 도저히 잠들 수 없었다. 도윤의 이름, 그의 얼굴, 뱅쇼의 향기… 이 모든 것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녀는 침대에 앉아 조심스럽게 도윤이 건넨 종이를 꺼내 들었다.
“할 말이 많다.”
그의 말이 자꾸만 귓가에 맴돌았다.
그 순간, 서윤의 기억 속에 흐릿한 장면이 스쳤다. 차가운 바람이 부는 눈 덮인 거리. 누군가의 손을 잡고 달리던 어린 자신. 그리고 낯선 목소리.
“절대 놓치지 마.”
서윤은 숨을 들이쉬며 손끝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도대체 나한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그녀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결국 그녀는 다시 간단한 옷을 걸치고 집을 나섰다. 겨울밤의 차가운 공기가 그녀를 감싸며 정신을 차리게 했다. 그녀가 향한 곳은 다시 그 골목이었다. "뱅쇼의 향기."
바의 문을 열었을 때, 재희는 여전히 바 뒤에 서 있었다. 그녀를 보자마자 재희의 얼굴에 놀라움이 스쳤다.
“다시 오셨네요.”
서윤은 그를 향해 다가가 깊은 숨을 내쉬었다.
“재희 씨.”
그녀는 간신히 말을 꺼냈다.
“도와주세요. 내가 뭘 잊어버린 건지... 알아야겠어요.”
3장: 첫 번째 단서
재희는 잠시 말을 잃었다. 서윤의 눈빛은 간절했고, 그 안에 담긴 혼란과 공허함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앉히고 다시 뱅쇼 한 잔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제가 뭘 도와드려야 할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천천히 이야기해 봐요.”
서윤은 한숨을 내쉬며 도윤과의 만남, 그리고 잊혀진 기억들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 사람... 도윤이라고 했죠. 그 이름이 너무 익숙해요. 하지만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요. 그리고...”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테이블 위의 뱅쇼 잔을 바라봤다.
“이 향기조차도... 익숙하지만, 어딘가 멀리 있는 기억 같아요.”
재희는 뱅쇼 잔을 그녀 앞으로 밀며 부드럽게 말했다.
“이 향은 기억을 자극하기에 충분히 강렬하죠. 특히, 누군가에게 중요한 순간에 함께였다면 더더욱요.”
서윤은 뱅쇼를 한 모금 마시며 눈을 감았다. 향기가 다시 그녀를 과거로 이끌었다. 찰나의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흐릿한 이미지가 스쳤다.
어린 자신이 커다란 와인통 옆에 앉아 있었다. 주변은 따뜻하고 빛으로 가득했으며, 누군가가 다정하게 말을 걸었다.
“이건 네가 아주 좋아할 거야. 조금 더 자라면 같이 만들 수 있겠지?”
서윤은 순간적으로 눈을 떴다. 손끝이 떨렸다.
“와인통... 거대한 와인통이 떠올랐어요. 그런데... 그게 어디였는지 모르겠어요. 중요한 곳인 것 같은데.”
재희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어졌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어렸을 때부터 와인과 관련된 추억이 있었나요?”
서윤은 고개를 저었다.
“전혀요. 저는 평범한 가정에서 자랐어요. 이런 향이나 와인은 제 인생과 아무 상관이 없었어요. 적어도... 제가 기억하기론요.”
재희는 서윤의 말을 듣고 잠시 고민하는 듯했다.
“그럼...” 그는 조용히 말을 이어갔다.
“그 기억이 정말 당신 것일까요?”
서윤은 재희를 바라보며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이죠?”
재희는 잔을 닦으며 신중한 어조로 말했다.
“기억은 때때로 스스로를 속일 때도 있어요. 당신이 느낀 감각이나 떠오른 장면이 꼭 당신의 것이라는 보장은 없어요. 특히 당신이 공백을 느끼고 있다면, 잊혀진 조각은 종종 다른 것과 섞이거나 왜곡되기도 하죠.”
서윤은 그의 말을 듣고 더 혼란스러워졌다.
“하지만 그 장면은 너무 선명했어요. 나를 부르던 목소리, 따뜻했던 공간... 그건 내 기억일 거예요. 분명히.”
재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 와인통이 어디에 있었을지 떠오르는 건 없나요? 장소나, 배경 같은 단서요.”
서윤은 머리를 감싸쥐며 집중하려 했지만, 이미지는 너무 짧고 희미했다. 그녀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아무것도.”
그때, 바의 문이 열리며 도윤이 들어섰다. 그는 서윤과 재희를 번갈아 보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 있었네.”
그는 서윤에게 다가와 앉으며 말했다.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우리가 같이 갔던 그 장소... 네가 기억해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게 실마리가 될지도 몰라.”
서윤은 그의 말에 당황하며 물었다.
“같이 갔던 장소라니요?”
도윤은 테이블에 손을 올리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옛날에 네가 와인 만드는 곳을 좋아했잖아. 너도 기억 안 나?”
그의 말에 서윤은 숨을 멈췄다.
“와인 만드는 곳?”
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 큰 와인통이 있던 곳. 그 장소를 너무 좋아했지. 항상 가고 싶어 했었잖아.”
서윤은 이마를 짚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와인통. 도윤. 뱅쇼의 향기. 그리고 잃어버린 조각들. 모든 것이 어렴풋이 연결되려는 순간, 또다시 감각이 흐릿해졌다.
재희는 이 대화를 지켜보며 얼굴이 굳어졌다.
“혹시...” 그는 입을 떼다 멈추더니, 대신 단호하게 말했다.
“그 장소가 아직 남아 있을 수도 있어요. 찾으러 가봅시다.”
4장: 와인통의 흔적
서윤과 재희, 도윤은 차가운 겨울밤을 뚫고 도시 외곽으로 향했다. 도윤의 기억 속에서 떠오른 장소는 한적한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오래된 와인 저장고였다. 한때 유명했던 와이너리의 일부였지만, 지금은 폐쇄된 채로 방치된 곳이었다.
“여기가 맞아.”
도윤이 차에서 내리며 말했다. 서윤은 얼어붙은 공기를 들이마시며 고개를 들었다. 눈앞의 풍경은 익숙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내가 정말 여기 와본 적이 있을까?”
서윤은 속삭이듯 말했다. 도윤은 웃으며 대답했다.
“당연히 그랬지. 네가 어릴 때 여길 얼마나 좋아했는데.”
재희는 조용히 서윤을 지켜보며 묵묵히 걸었다. 그의 시선에는 복잡한 감정이 어렸다. 서윤은 그것을 알아채지 못한 채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와인 저장고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녹슨 문과 벗겨진 페인트, 얼어붙은 공기가 공간을 차갑게 감쌌다. 서윤은 조심스럽게 문을 밀었다.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오래된 나무와 와인의 묵직한 향이 스쳤다.
그녀의 눈이 내부를 천천히 훑었다. 어두운 공간 안에는 거대한 와인통들이 여전히 줄지어 있었다.
“이건...”
서윤은 숨을 삼켰다. 와인통을 보는 순간, 기억 속 잃어버린 조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조심해, 서윤아! 넘어질라!”
어린 자신이 와인통 사이를 달리고 있었다. 누군가 그녀를 다정하게 부르며 손을 잡아주었다. 따뜻했던 손길, 웃음소리, 그리고... 갑작스러운 충격과 함께 모든 것이 끊겼다.
서윤은 이마를 짚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재희가 그녀를 붙잡았다.
“괜찮아요?”
“네... 근데...”
그녀는 와인통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여기가 맞아요. 저 여기 있었어요. 어렸을 때...”
“뭐가 기억나?” 도윤이 다급하게 물었다.
서윤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기서 누군가랑 있었어요. 아주 행복했던 순간이었어요. 그런데...”
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 따뜻했던 기억이 갑자기 어둡고 차가운 감정으로 덮여버렸다.
“뭔가 나쁜 일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녀의 말에 도윤은 잠시 침묵했다.
“그건...”
도윤이 말을 꺼내려는 순간, 재희가 조용히 끼어들었다.
“혹시 뭔가 찾을 만한 게 있을지도 몰라요. 천천히 둘러봅시다.”
서윤과 도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와인통 사이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서윤은 손끝으로 와인통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차가운 나무의 감촉은 그녀의 기억과 묘하게 연결되는 것 같았다.
저장고 가장 안쪽에서, 서윤은 작은 나무 상자를 발견했다. 오래된 먼지가 쌓여 있었지만 상자에는 여전히 누군가 소중히 여겼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오래된 사진 한 장과 낡은 목걸이가 들어 있었다. 사진 속에는 두 명의 어린아이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한 명은 분명히 어린 서윤이었다. 그런데 다른 아이는...
“이 아이가 누구지?”
서윤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사진 속의 또 다른 아이는 서윤과 비슷한 또래였지만, 그녀의 기억 속 어디에도 없었다.
그 순간, 도윤이 다가왔다. 사진을 본 그는 멈칫하며 굳은 표정을 지었다.
“이건... 네가 몰라도 되는 거야.”
“뭐?”
서윤은 깜짝 놀라 도윤을 쳐다봤다.
“나랑 같이 있던 아이잖아. 누군지 알아?”
도윤은 입을 굳게 다물었고, 그를 지켜보던 재희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말해야 하지 않을까요? 지금은 숨길 때가 아니에요.”
도윤은 잠시 고민하더니 결국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아이... 네가 아주 어릴 때 많이 따랐던 애야. 넌 아마 그 아이를 기억 못 할 거야. 사고가 있었으니까.”
서윤은 놀라 물었다.
“사고라니? 무슨 사고?”
도윤은 대답을 망설였지만, 더 말하려던 찰나 저장고 안쪽에서 무거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있어.”
재희가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5장: 의문의 그림자
재희가 낮은 목소리로 경고하자, 세 사람은 긴장하며 발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장고 깊은 곳에서 검은 그림자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무겁고 느릿한 발걸음. 그 뒤로 오래된 나무 바닥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메아리쳤다.
“여기 누가 있을 줄 알았지.”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어둡게 울렸다. 그는 검은 코트를 입고 있었고, 날카로운 눈빛이 서윤과 도윤, 재희를 차례로 훑었다.
“누군데 여기서 이러고 있지?”
그는 조용하지만 위협적으로 말을 걸었다.
도윤이 먼저 나섰다.
“우린 그냥 지나가다가 들른 거야. 오래된 곳이라 궁금했을 뿐이야.”
그의 말은 최대한 담담했지만, 서윤은 그가 손을 주머니 속에 넣어 힘을 주고 있는 것을 알아챘다. 도윤의 긴장감은 그에게도 분명히 전달되고 있었다.
남자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런 곳을 지나가다 들를 리가 없지. 특히 너희가 찾고 있는 게 있다면 더더욱.”
그는 바닥에 놓인 나무 상자를 힐끔 보았다.
서윤은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
“저 상자는 제 거예요. 여기서 찾은 거고, 제 기억에 관한 단서일지도 몰라요.”
그녀의 말에 남자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기억?”
남자는 그 말을 되뇌더니, 천천히 상자 쪽으로 걸어갔다. 재희가 즉각 서윤의 앞으로 나섰다.
“거기까지입니다.”
재희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남자는 재희를 바라보며 짧게 웃었다.
“너도 참 오래도록 여기 남아 있었구나. 아직도 그 여자한테 미련이 있는 거야?”
그의 말에 재희의 얼굴이 굳어졌다.
서윤은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재희를 바라보며 물었다.
“저 남자가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재희는 그녀를 바라보다 입을 다물었다.
남자는 고개를 돌려 서윤에게 말했다.
“너 아직도 모르겠지. 네가 여기 왜 왔는지, 이 장소가 왜 중요한지.”
그는 천천히 그녀 쪽으로 다가왔다.
“넌 단순히 기억을 잃은 게 아니야. 누군가 너에게서 그 기억을 빼앗아간 거야.”
서윤은 그의 말을 듣고 충격에 휩싸였다.
“뭐라고요? 제 기억을 빼앗다니... 누가요?”
남자는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그걸 알려면, 너희가 이 장소를 다시 조사해야겠지. 하지만 내가 묻고 싶은 건...”
그는 한 걸음 더 다가왔다.
“네가 정말 진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느냐는 거야.”
“그만.”
도윤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남자와 서윤 사이에 서서, 손을 뻗어 그녀를 보호하려는 듯 막아섰다.
“우린 네가 말하는 어떤 음모에도 얽히고 싶지 않아. 그냥 기억을 되찾고 싶을 뿐이야.”
남자는 잠시 도윤을 바라보더니 피식 웃었다.
“그렇게 단순한 일이 아니야. 네가 숨기고 있는 것부터 먼저 말해보지 그러냐, 도윤아?”
서윤은 도윤을 바라보며 물었다.
“무슨 뜻이에요? 도윤, 숨기는 게 있어요?”
도윤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돌렸다. 그의 침묵은 무엇인가를 인정하는 듯 보였다.
“재희.”
남자가 이번에는 재희를 바라보며 말했다.
“넌 이 여자에게 뭘 더 감추고 있는 거지? 아니면 네가 그녀에게서 뭘 빼앗아 갔는지?”
재희의 손이 잔뜩 주먹을 쥐었다. 그의 얼굴엔 복잡한 감정이 서렸다. 서윤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뭐가 숨겨져 있는 거예요? 저에게 솔직히 말해주세요!”
그러나 그 순간, 남자는 천천히 뒷걸음질치며 말했다.
“이만하면 됐어. 너희 셋이 여기서 뭘 찾든 간에, 네가 원했던 답을 찾는 순간 더 많은 걸 잃게 될 거야.”
그는 문밖으로 나가며 마지막 말을 남겼다.
“진실은 언제나 값비싸니까.”
6장: 기억의 조각들
남자가 떠난 뒤, 저장고에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서윤은 상자 속의 사진과 목걸이를 손에 쥔 채로 굳어 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은 남자가 남긴 마지막 말로 가득했다.
“진실은 언제나 값비싸니까.”
도윤과 재희는 각각 다른 방향을 바라보며 침묵했다. 도윤은 입술을 꽉 다문 채 손을 주먹 쥐고 있었고, 재희는 눈을 감고 깊이 생각에 잠긴 모습이었다.
“뭐든 숨기고 있는 게 있다면 지금 말해주세요.”
서윤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저는 제 기억을 되찾고 싶어요. 그리고 이게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한다면, 그걸 감당할 준비도 되어 있어요.”
재희는 천천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깊은 망설임과 죄책감이 담겨 있었다. 도윤 역시 고개를 돌려 서윤을 바라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진 속 아이는 누군가요?”
서윤은 손에 쥔 사진을 들어 보이며 두 사람에게 물었다.
“도윤, 당신은 이 아이를 안다고 했어요. 더 이상 숨기지 말아요.”
도윤은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사진 속 아이는 네가 어릴 때 가장 가까웠던 친구였어. 이름은... 하진. 그는 네 기억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아이야.”
“그럼 왜 난 그를 기억하지 못하죠?”
서윤은 더 많은 대답을 원하며 도윤을 응시했다.
도윤은 말문을 열려 했지만, 재희가 먼저 끼어들었다.
“서윤, 너의 기억은 자연스럽게 사라진 게 아니야.”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호했다.
“너의 기억은 누군가에 의해 봉인된 거야.”
“봉인됐다고요?”
서윤은 충격을 받은 듯 재희를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누가 제 기억을 그렇게 했다는 거죠?”
재희는 서윤의 눈을 피하며 말했다.
“너를 지키기 위해서였어. 네가 겪었던 일들은 너무 큰 상처를 남겼고, 네 부모님은 네가 기억하지 않는 게 더 안전하다고 판단했어.”
“부모님이...”
서윤의 목소리는 나직했고,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그럼 그 기억 속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왜 그렇게까지 해야 했던 거예요?”
도윤이 입을 떼었다.
“너희 가족과 하진의 가족은 이곳, 이 와인 저장고를 중심으로 오래된 인연을 가지고 있었어. 하지만 하진의 가족이 와인 사업과 관련된 사고로 모두 목숨을 잃었지. 그리고 그 사고는...”
그의 목소리가 잠시 흔들렸다.
“너와 관련되어 있었어.”
서윤은 충격으로 머리가 하얘졌다.
“내가... 그 사고에 관련이 있었다고요?”
재희는 조용히 말했다.
“너는 당시 하진과 함께 있었고, 사고가 일어날 때 유일하게 살아남았어. 하진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네가 큰 충격을 받았고, 그 기억이 너의 마음을 짓눌렀어. 네 부모님은 네가 그 기억 속에서 평생 괴로워할 것을 우려했지.”
서윤의 눈앞이 흐려졌다. 어렴풋이 떠오르던 기억의 단편들이 이제 한데 맞춰지기 시작했다. 와인통, 하진, 그리고 손을 잡고 달리던 그 날의 기억.
“그럼...”
서윤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하진은 어떻게 됐나요?”
도윤은 고개를 숙였다.
“사고로 목숨을 잃었어. 하지만...”
그는 재희를 바라보며 말을 멈췄다.
재희는 서윤을 보며 말했다.
“하지만 하진이 남긴 메시지가 있어. 그리고 그것이 네 기억 속에 봉인된 채 남아 있어.”
서윤은 숨을 삼키며 물었다.
“그 메시지가 뭔데요?”
재희는 입술을 굳게 다물며 한숨을 쉬었다.
“그건 네가 기억을 완전히 되찾을 때야 알 수 있을 거야. 하지만 그걸 알게 되면, 네가 정말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서윤은 고개를 들고 재희와 도윤을 차례로 바라봤다. 그녀의 눈빛은 이제 두려움 대신 결의로 가득 차 있었다.
“모든 걸 기억할래요. 하진이 남긴 메시지든, 그날의 진실이든 전부 알고 싶어요. 그리고 제가 겪었던 모든 것을 직면할 준비가 되어 있어요.”
그 순간, 저장고 문이 다시 열리며 무거운 발걸음 소리가 울렸다. 세 사람의 시선이 문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남자가 다시 서 있었다. 그의 손에는 낡은 노트가 들려 있었다.
“진실을 알고 싶다면, 이것부터 읽어봐야겠지.”
그는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노트를 서윤에게 내밀었다.
7장: 봉인된 기억
서윤은 손을 떨며 남자가 건넨 낡은 노트를 받아들었다. 노트의 표지는 오래된 가죽으로 감싸져 있었고,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노트에서 희미한 와인의 향이 풍겼다.
“이게... 하진의 건가요?”
서윤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남자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안에는 그날의 모든 진실이 담겨 있다. 너희 가족, 하진의 가족, 그리고 네가 잊으려 했던 것들까지.”
남자는 차갑게 말하며 재희와 도윤을 힐끔 보았다.
“이제 더 숨길 건 없겠지.”
재희와 도윤은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서윤은 천천히 노트를 열었다.
노트의 첫 장에는 하진의 필체로 적힌 문장이 있었다.
“이것을 읽는 사람이 너라면, 서윤, 난 네가 나를 잊지 않았길 바란다.”
서윤은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머릿속에 강렬한 감각이 스쳤다. 어릴 적 하진과 함께 뛰놀던 장면, 웃음소리, 그리고 와인 저장고에서 함께했던 시간이 떠올랐다. 그러나 곧 그 기억은 사고의 파편으로 바뀌었다.
노트는 하진이 남긴 짧은 일기들로 채워져 있었다. 그는 자신의 가족이 와인 사업에서 겪은 갈등과 위협, 그리고 서윤과 함께 보낸 소중한 날들에 대해 적어두었다.
그러나 몇 페이지를 넘기자 분위기는 달라졌다.
“그날, 우린 그곳에 가지 말았어야 했다.”
그 문장은 서윤의 숨을 멎게 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서윤은 노트를 읽다가 멈추고 도윤에게 물었다. 그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하진의 가족은 와인 저장고를 놓고 심각한 갈등에 휘말려 있었어.”
도윤이 입을 열었다.
“그날, 하진과 네가 놀고 있을 때 어른들끼리 다툼이 있었고... 결국 사고로 이어졌어.”
서윤은 노트를 다시 읽기 시작했다.
“내가 서윤을 지키려 했지만, 결국 내가 선택한 길이 모두를 위험에 빠뜨렸다.”
“서윤, 네가 이걸 읽는다면... 그날 내가 했던 선택을 용서해주길 바란다.”
서윤의 손이 멈췄다. 하진의 글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마지막 페이지 한구석에는 작은 지도 같은 것이 그려져 있었다. 와인 저장고 근처의 장소를 표시한 듯한 지도였다.
“이건 뭐죠?”
서윤이 노트를 들고 남자에게 물었다.
남자는 냉소적인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건 네가 마지막으로 가야 할 곳을 가리키고 있어.”
“거기서 네가 잃어버린 기억의 마지막 조각을 찾게 될 거야. 하지만...”
그는 그녀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진실이 항상 너를 자유롭게 하진 않는다는 걸 명심해.”
재희는 서윤의 옆으로 다가와 조용히 말했다.
“서윤, 정말 가고 싶어요? 이걸 읽은 것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어요. 더 깊이 들어가면... 후회할지도 몰라요.”
서윤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지금 멈출 수 없어요. 하진의 메시지가 여기서 끝나지 않는 것 같아요. 그가 남긴 마지막 흔적을 봐야겠어요.”
서윤은 재희와 도윤, 그리고 남자를 따라 지도에 표시된 장소로 향했다. 와인 저장고에서 멀지 않은 숲 속의 폐쇄된 별장이었다.
별장은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품고 있었다. 문이 삐걱거리며 열리자 내부는 먼지와 거미줄로 가득했다. 그러나 서윤은 주저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곳이...”
그녀는 한참을 둘러보더니 말을 멈췄다. 벽에는 오래된 그림과 함께 하진의 가족사진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방 한가운데, 낡은 상자가 놓여 있었다.
상자를 열자, 그 안에는 서윤의 이름이 새겨진 작은 목걸이와 함께 또 다른 메모가 들어 있었다.
“서윤, 네가 나를 기억하지 못해도 괜찮아. 하지만 내가 널 얼마나 소중히 여겼는지만은 기억해줬으면 좋겠어. 넌 항상 나의 빛이었으니까.”
서윤은 목걸이를 손에 쥐고 울음을 삼켰다. 그녀의 기억 속 마지막 조각이 퍼즐처럼 맞춰졌다. 하진과 함께했던 날들, 그리고 그를 잃어버린 순간의 충격이 다시금 떠올랐다.
재희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서윤, 이제 알았으니... 너 자신을 용서해야 해요. 하진은 너를 원망하지 않았어요.”
서윤은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알겠어요. 내가 왜 이 기억을 잃고 싶어 했는지. 하지만 이제는 도망치지 않을래요.”
그녀는 목걸이를 목에 걸며 말했다.
“이제 제 삶을 제 방식대로 살아갈 거예요. 하진을 기억하면서.”
8장: 진실의 충돌
폐쇄된 별장을 나와 차가운 바람 속으로 걸어 나오는 서윤의 손에는 목걸이가 꼭 쥐어져 있었다. 하진의 마지막 메시지는 그녀의 가슴을 먹먹하게 했지만, 동시에 강렬한 결의도 느끼게 했다.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아요.”
서윤은 혼잣말처럼 속삭였다.
“제가 왜 이 기억을 잊으려 했는지, 그리고 왜 다시 찾아야 했는지.”
도윤은 그녀를 조심스럽게 바라봤다.
“괜찮겠어? 네가 찾은 진실이 아직 끝이 아닐지도 몰라.”
재희도 곁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지금까지 봐온 건 단지 조각일 뿐이에요. 하진의 가족이 겪었던 사고는 단순한 비극이 아니었을지도 몰라요.”
서윤은 두 사람의 말을 듣고 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목걸이를 다시 목에 걸고 말했다.
“끝까지 가볼래요. 이 기억들을 되찾은 이상, 이제는 도망칠 수 없어요.”
“남은 진실이 있다면, 어디에 있을까요?”
서윤의 질문에 재희는 저장고에서 발견한 노트를 다시 펼쳤다. 그 안에는 지도 외에도 몇 개의 글이 더 적혀 있었다.
“네 기억은 단지 시작일 뿐이야. 모든 답은 우리 가족이 지키려 했던 ‘향기’ 속에 있어.”
“향기...”
서윤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무슨 뜻이죠?”
재희가 설명하려던 순간, 멀리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향기 속에 모든 답이 있지.”
남자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이번엔 낡은 가죽 가방을 들고 있었다.
“여전히 이걸 설명하지 못하겠나, 재희? 이제 말할 때가 됐지 않아?”
그의 눈빛은 도전적이었다.
“그만해.”
재희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
“이건 서윤에게 설명할 문제지, 네가 간섭할 일이 아니야.”
남자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내가 아니면 네가 끝까지 숨길 거잖아. 아니, 지금까지 숨겨왔던 것처럼.”
서윤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듣다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두 분 다 그만하세요! 숨기는 게 뭔데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남자는 조용히 가방을 열어 작은 병을 꺼냈다. 병 속에는 짙은 자주색 액체가 담겨 있었다. 그는 그것을 서윤에게 내밀며 말했다.
“이건 네가 찾고 있는 ‘향기’야. 하진의 가족이 이 저장고를 마지막까지 지키려 했던 이유.”
서윤은 병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게... 뭐죠?”
“완벽한 뱅쇼의 원액.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세대를 걸쳐 내려온 가족의 비밀 그 자체지. 하지만 이걸 둘러싼 탐욕이 결국 모든 걸 망쳤어.”
남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재희가 차갑게 말했다.
“하진의 가족은 이 비밀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택했어. 그리고 너는 그 비극의 중심에 있었지, 서윤.”
서윤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저요...? 제가 뭘 했는데요?”
도윤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날 너와 하진이 놀고 있던 와인통에... 이 원액을 숨겨두었던 거야. 어른들의 다툼이 거기로 몰리면서 사고가 난 거지.”
서윤은 머리를 감싸쥐며 외쳤다.
“그럼 그 비극이... 저 때문이라고요? 제가 그걸 숨겨서... 하진이 그렇게 된 거라고요?”
재희는 그녀에게 다가와 단호히 말했다.
“그게 네 잘못이 아니야. 네가 그 상황을 선택한 것도, 어른들의 탐욕도 너와는 상관없었어.”
남자는 병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하지만 이 향기 때문에 모든 게 시작된 건 맞지. 너희 모두가 알고 싶어 했던 진실은 바로 여기 있어. 이제 네가 이걸 어떻게 할지는 네 선택이야.”
서윤은 병을 바라보았다.
하진과 함께했던 순간들, 그리고 그가 자신에게 남긴 마지막 메시지가 떠올랐다.
“널 잃지 않겠다고 약속했었는데, 난 그러지 못했어. 하지만 너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어.”
서윤은 병을 단호히 받아들고 말했다.
“이건 그저 비밀일 뿐이에요. 이걸 둘러싼 탐욕 때문에 모두가 상처를 입었죠. 하지만 이제는 끝내야 해요. 저는 제 기억과 과거를 받아들이고, 더는 도망치지 않을 거예요.”
서윤은 병을 열어 와인 저장고의 깊은 땅으로 그것을 쏟아부었다. 자줏빛 액체가 흘러내리며 바닥을 적셨고, 뱅쇼의 향이 공기를 가득 채웠다.
그녀는 한 걸음 물러서며 마지막으로 말했다.
“이제는... 자유로워질래요.”
“끝난 건가?”
도윤이 조용히 물었다.
“끝났어.”
재희가 대답했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안도와 함께 어딘가 모를 슬픔이 서려 있었다.
서윤은 깊게 숨을 들이쉬며 고개를 들었다. 차가운 바람이 그녀의 얼굴을 스쳤다. 과거의 무게는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그 무게를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에필로그: 뱅쇼의 새로운 향기
겨울은 끝나가고 있었지만, 찬 공기는 여전히 서윤의 피부를 스치며 맑은 정신을 유지시켰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구름 사이로 햇살이 내려오며 도시를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뱅쇼의 향기."
서윤은 자신이 다시 찾은 와인 바 간판을 올려다보며 작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지난 몇 주 동안 바쁘게 움직였다. 하진의 마지막 메시지와 그날의 진실을 마주한 이후, 서윤은 자신의 인생을 다시 써 내려가기로 결심했다.
뱅쇼의 향기 바는 이제 그녀가 새로운 시작을 꿈꾸는 장소가 되었다. 재희와 함께 이곳을 운영하며, 단순한 와인 바를 넘어 사람들이 서로의 이야기를 공유하고 위로받는 공간으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오늘의 뱅쇼는 특별하다면서요?”
도윤이 바에 앉아 농담처럼 물었다. 그는 여전히 서윤을 지켜보며 그녀를 응원하고 있었다.
서윤은 그에게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특별하죠. 오늘은 새 레시피를 시도해볼 거거든요.”
재희가 그녀를 거들며 말했다.
“그 레시피는 아마 전혀 예상 못 한 맛일 거야. 하지만 분명히 기억에 남을걸.”
서윤은 뱅쇼를 만드는 동안 잠시 멈추고 손끝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과거의 상처와 하진과의 기억, 그리고 자신을 괴롭혔던 무거운 감정들이 이제 더 이상 그녀를 짓누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진.”
그녀는 조용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나는 계속 앞으로 나아갈 거야. 널 기억하면서도, 나 자신을 잃지 않으면서.”
뱅쇼의 향기가 공간을 채우며 손님들이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바 안은 따뜻한 웃음소리와 함께 활기가 넘쳤다.
서윤은 재희와 도윤에게 와인 잔을 건네며 말했다.
“이제는 우리가 새로운 추억을 만들어야 할 시간이에요. 과거는 소중하지만, 그건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가 아니잖아요.”
재희는 잔을 들며 미소 지었다.
“맞아요. 이곳은 새로운 시작을 위해 있는 곳이니까요.”
서윤은 손님들에게 다가가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의 뱅쇼는 특별한 향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잇는 향기죠. 즐겨주세요.”
뱅쇼의 향기 속에서, 서윤은 더 이상 과거에 머물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삶을 향한 새로운 길을 열었고, 그곳에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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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25 - [문학 (Literature)/한국 시 (Korean Poetry)] - Poem) 이상, <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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