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장독간의 봉선화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여름날, 정우는 허름한 쪽방의 창가에 앉아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창밖으로 흘러내리는 빗물 사이로 어렴풋이 보이는 골목길 끝, 누군가의 담장 밑에서 붉게 피어난 봉선화 한 송이가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정우의 마음속에는 고향 장독간 앞에서 활짝 피어있던 봉선화들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아이고, 우리 정우야. 이리 와봐라. 봉선화 꽃물 들여줄게." 누님의 목소리가 마치 어제처럼 생생하게 들려왔다. 장독간 앞에 쪼그리고 앉아 정우의 손톱에 꽃잎을 하나하나 정성스레 올려놓던 누님의 손길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때는 몰랐다. 그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아니, 이게 뭐야! 남자가 무슨 꽃물을 들어!" 투정부리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났다.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