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선화의 꽃물>
1장: 장독간의 봉선화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여름날, 정우는 허름한 쪽방의 창가에 앉아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창밖으로 흘러내리는 빗물 사이로 어렴풋이 보이는 골목길 끝, 누군가의 담장 밑에서 붉게 피어난 봉선화 한 송이가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정우의 마음속에는 고향 장독간 앞에서 활짝 피어있던 봉선화들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아이고, 우리 정우야. 이리 와봐라. 봉선화 꽃물 들여줄게."
누님의 목소리가 마치 어제처럼 생생하게 들려왔다. 장독간 앞에 쪼그리고 앉아 정우의 손톱에 꽃잎을 하나하나 정성스레 올려놓던 누님의 손길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때는 몰랐다. 그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아니, 이게 뭐야! 남자가 무슨 꽃물을 들어!"
투정부리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났다. 하지만 누님은 고집스레 정우의 손톱에 꽃잎을 올려놓았었다.
"우리 정우, 이 꽃물처럼 예쁘게 자랄 거야. 착하고 바르게..."
문득 정우는 자신의 거칠어진 손톱을 바라보았다. 전선을 만지고, 전봇대를 오르내리며 까맣게 변해버린 손톱에는 이제 꽃물은커녕 흙때가 가득했다.
"아이고, 누님. 이런 동생을 보면 뭐라고 하실까..."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그 순간, 창밖의 봉선화가 비바람에 흔들리면서도 꿋꿋이 피어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누님이 건네는 미소처럼 따스하게.
"그래도 난 잘 살고 있어요, 누님. 이렇게 하루하루...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정우는 주머니에서 낡은 수첩을 꺼내들었다. 그 안에는 작년 여름 고향에서 가져온 봉선화 꽃잎이 말라 붙어있었다. 비록 색은 바랬지만, 그 모양만큼은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마치 누님의 사랑처럼.
창밖으로 들려오는 빗소리가 점점 거세져갔다. 마치 고향의 이야기를 들려주려는 듯이.
2장: 도시의 노동 현장
"야! 정우야! 정신 차려! 위험해!"
민수의 날카로운 고함소리에 정우는 흠칫 놀라 전선에서 손을 떼었다. 아차 싶었다. 잠시 한눈을 판 사이 위험한 고압선을 맨손으로 잡을 뻔했다.
"아, 민수야. 고마워."
"뭐가 고마워. 죽을 뻔했잖아! 또 고향 생각하고 있었지?"
민수의 말에 정우는 겸연쩍게 웃었다. 전봇대 위에서 바라보는 도시의 전경은 마치 거대한 미로 같았다. 회색빛 건물들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고향의 그것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야, 이거 봐라. 내가 점심으로 뭘 싸왔게!"
정우는 도시락을 열어 보였다. 그런데 웬걸, 도시락 안에는 밥과 함께 꼬막이 가득했다.
"어? 이게 뭐야?"
"후후, 어제 시장에서 꼬막이 특별히 싸게 나와서 말이야. 고향 생각나서 사봤어."
"아니, 꼬막을 도시락에 싸오다니... 너 정말..."
민수는 한숨을 쉬면서도 웃음을 참지 못했다. 정우의 이런 엉뚱함은 이제 익숙했다.
"그나저나 저기 봐라. 새로 온 감독관이다."
정우와 민수는 서둘러 일에 복귀했다. 일본인 감독관의 날카로운 시선이 등 뒤로 느껴졌다. 하지만 정우의 입가에는 여전히 미소가 남아있었다. 꼬막을 씹을 때마다 떠오르는 고향의 맛 때문이었다.
"저 감독관, 우리가 꼬막 먹는 거 알면 또 뭐라 하겠지?"
"쉿! 조용히 해. 그래도 맛있다."
둘은 키득거리며 도시락을 비웠다. 높은 전봇대 위, 위험한 전선 사이에서도 이들의 우정은 꽃처럼 피어났다.
3장: 현실을 일깨우는 민수
"야, 정우야. 너 또 그거 보고 있냐?"
민수가 들어오자마자 한숨을 내쉬었다. 정우는 허둥지둥 낡은 수첩을 주머니에 넣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아니... 그게..."
"뭐가 아니야. 또 말린 봉선화 보고 있었지? 그거 좀 버려라. 너 그거 보면서 얼마나 한숨을 쉬는 줄 알아?"
민수는 발걸음을 옮기다 갑자기 펄쩍 뛰었다. 방 한구석에 놓인 화분에서 봉선화 새싹이 올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게 뭐야? 너 여기서 봉선화를 키워? 아니, 도시 한복판 전기공사 일용직이 꽃을 키워?"
"그게... 며칠 전에 시장에서 씨앗을 팔길래..."
민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갑자기 폭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너 정말 특이한 놈이야. 전기공이 봉선화를 키우다니. 아니, 잠깐... 혹시 그 씨앗 파는 사람이 예쁜 아가씨였어?"
정우는 얼굴이 붉어졌다.
"아니... 그건 아니고..."
"거봐! 네 얼굴 봐! 아, 이 바보같은 녀석. 그래서? 그 아가씨한테 번호라도 받았어?"
"아니... 그게... 그냥 씨앗만..."
"아이고, 이 답답한 녀석아. 그래서 꽃을 키우고 있다고? 혹시 그 아가씨가 다시 올까봐?"
민수의 놀림에 정우는 더욱 당황했다. 사실 씨앗을 판 것은 할머니였다. 하지만 이런 민수의 오해가 차라리 다행이었다. 고향이 그리워 봉선화를 키운다고 하면 또 잔소리를 들을 테니까.
"그나저나 너 이러다 큰일난다. 여기가 어디라고 꽃을 키워. 감독관이 알면 또 시끄러울텐데..."
"괜찮아. 이건 그냥 우리 방이잖아."
"아이고, 너 진짜... 근데 저기 봐봐. 저 화분 옆에 있는 건 뭐야?"
정우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민수가 재빨리 수첩을 낚아챘다.
"아냐! 그거 주라!"
"흐흐흐... 어디 보자... 오! 이건 뭐야? 편지까지 있네? '사랑하는 동생에게'... 푸하하!"
"야! 그거 누님 편지라고!"
둘은 방 안을 뛰어다니며 한바탕 소동을 벌였다. 결국 수첩은 다시 정우의 손에 들어왔지만, 민수의 장난스러운 미소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정우야... 난 네가 걱정돼서 그래. 너무 과거에만 매달리지 마. 우리가 살아야 할 곳은 여기야. 이 각박한 도시, 이 고단한 현실 말이야."
민수의 목소리가 갑자기 진지해졌다.
"알아... 근데 가끔은... 그리워도 되잖아..."
"그래... 그리워하는 건 좋아. 하지만 너무 거기 빠지진 마. 우리에겐 지금이 더 중요하니까."
4장: 단속의 위기
"야! 순사다!"
누군가의 외침과 함께 작업장이 순식간에 술렁거렸다. 일본 경찰의 불시 단속이었다. 정우는 그만 전선을 고치다 말고 허둥지둥 전봇대에서 내려오려 했다.
"이봐! 거기 전봇대 위의 사람!"
일본어가 섞인 거친 한국말이 들려왔다. 정우는 당황한 나머지 공구함을 떨어뜨렸고, 쇠도구들이 땅에 부딪히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아이고... 이게 뭔 날벼락이야..."
그때 민수가 달려와 소리쳤다.
"정우야! 빨리 내려와! 근데... 어라? 하하하!"
민수의 웃음소리에 정우는 영문을 몰랐다.
"뭐가 그리 웃긴데?"
"너... 너 바지가... 푸하하!"
정우가 내려다보니 작업복 바지가 전선에 걸려 찢어져 있었다. 하필 무늬가 팬더 그림인 속옷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
"아니, 이게 무슨..."
"이봐! 당신! 허가증을 보여주시오!"
순사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정우는 바지를 부여잡은 채 어찌할 바를 몰랐다.
"저... 저기 민수야..."
"걱정 마! 내가 좋은 수가 있어!"
민수는 재빨리 자신의 작업복 하의를 벗어 정우에게 던졌다.
"빨리 갈아입어! 나는... 음... 아! 그래!"
민수는 갑자기 땅바닥에 주저앉더니 큰 소리로 외쳤다.
"아이고! 제 다리에 쥐가 났어요! 어머나, 이게 웬일이야!"
민수의 과장된 연기에 주변 동료들이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순사는 당황한 듯 발걸음을 멈추었다.
"아니, 저 사람이 왜 저러나..."
"아이고, 죽겠다! 누가 좀 도와주세요! 다리가... 다리가..."
민수의 연기는 점점 더 과장되어갔다. 그 틈을 타 정우는 재빨리 바지를 갈아입었다.
"이봐! 당신! 그만하시오!"
"앗! 그런데 이게 왠걸! 다리가 멀쩡해졌어요! 아이고, 이런 기적이! 순사님이 오시니 병이 나았나봐요!"
주변에서 폭소가 터져 나왔다. 순사는 얼굴을 붉히며 자리를 떠났다.
"민수야... 너 정말..."
"뭐, 됐잖아. 그나저나... 팬더 무늬 속옷이라니... 푸하하!"
"아, 그건... 세일하길래..."
"세일? 너 또 꼬막 살 때처럼 세일에 혹했구나?"
정우는 쑥스러워하며 웃었다. 하지만 곧 민수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정우야, 오늘 운이 좋았지만... 앞으론 더 조심해야 해. 허가증도 없이 이러다 정말 큰일 날 수 있어."
"알아... 근데 허가증을 받으려면..."
"그래, 돈이 많이 들지. 우리같은 놈들한테는 그림의 떡이라고."
둘은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곧 민수가 씩 웃으며 말했다.
"그나저나... 팬더가 참 귀여웠다?"
"야!"
5장: 누님의 편지
정우는 우체국 앞에서 편지를 읽었다. 누님의 단정한 글씨체가 마음을 따뜻하게 했다.
"사랑하는 정우에게.
오늘도 장독간 앞에 봉선화가 활짝 폈다. 네가 좋아하던 그 자리에 말이야. 근데 이놈의 봉선화들이 너무 못됐어. 네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작년보다 더 예쁘게 피었거든. 흥, 이런 배신자들..."
정우는 피식 웃었다. 누님은 여전히 투정과 농담으로 동생을 걱정하고 있었다.
"마을에는 요즘 일본 순사들이 더 자주 들락거려. 농사지은 것 절반은 공출이라고 가져가버리더라. 허긴, 그나마 우리는 나은 편이야. 옆집 순이네는 쌀 한 톨도 못 남겼다더라... 아, 근데 우리 정우 걱정하진 마라. 누님이 잘 버티고 있으니까.
그런데 말이다... 어젯밤에 재미난 일이 있었어. 장독간에 숨어든 도둑고양이가 있었거든? 그놈이 생선 한 토막을 물고 달아나다가 그만 장독에 부딪혔지 뭐야. 쿵! 하는 소리에 깜짝 놀라서 뛰어나갔는데... 아니, 이 녀석이 생선은 꼭 물고 있더라니까! 그래서 내가 소리쳤지. '이놈의 고양이야! 그거라도 공출할 테냐?' 하고 말이야. 그랬더니... 이놈이 갑자기 도로 와서 생선을 내 발 앞에 놓고 가지 뭐야! 아이고, 웃겨 죽는 줄 알았다..."
정우는 편지를 읽다가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지만 상관없었다.
"참, 너도 알지? 장터 끝에 있던 오 씨 할배... 그 할배가 요즘 재미난 장사를 시작했어. 뭔고 하니... 봉선화 씨앗 장사야! 자기가 모은 씨앗이라면서 한 움큼에 10전씩 받더라고. 근데 이게 웬걸? 할배가 파는 봉선화 씨앗에서는 온갖 색깔의 꽃이 핀데! 빨간색, 분홍색은 기본이고... 심지어 파란색도 있다나? 허허, 그 할배 또 거짓말이지? 세상에 어디 파란 봉선화가 있다고..."
정우는 잠시 읽기를 멈추고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며칠 전 시장에서 산 봉선화 씨앗이 나왔다. 파란색이 피어날 거란 말에 덜컥 속아 넘어간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우리 정우, 잘 지내지? 밥은 제때 챙겨 먹고? 옷은 따뜻하게 입고 다니고? 아이고, 내가 또 잔소리를 하고 있구나. 넌 이제 다 큰 사내인데... 근데 말이다, 혹시 도시에서 마음에 드는 처자라도 생겼니? 있으면 누님한테 솔직히 말해! 내가 널 위해서 맛있는 반찬도 많이 담가줄게.
아, 맞다! 네가 보내준 돈은 잘 받았다. 고마워... 정우야. 누님이 늘 미안해. 동생 등 떠밀어 도시로 보내고... 하지만 우리 정우, 힘들다고 지레 포기하지는 마라. 봉선화처럼... 꿋꿋이 피어나거라.
그러고 보니 올해 봉선화는 꽃물이 더 짙더구나. 마치 네 앞날처럼..."
정우는 편지를 가슴에 꼭 끌어안았다. 눈가에 맺힌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6장: 도시 속 봉선화
"이게 뭐야..."
정우는 허름한 골목길 끝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무너져가는 담벼락 틈새에서 한 송이 봉선화가 피어있었다. 그것도 파란색으로.
"아니... 설마..."
정우는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다. 분명 파란 봉선화였다. 오 씨 할배가 파는 씨앗에서 정말 파란 봉선화가 피어난 걸까? 아니면 자신이 환각을 보는 걸까?
"야! 정우야!"
뒤에서 들려오는 민수의 목소리에 정우는 흠칫 놀랐다.
"뭐하고 있어? 또 봉선화야? 아니, 근데 저게 뭐야... 파란색이네?"
"그치? 나도 방금 봤어."
민수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갑자기 담벼락으로 다가가 꽃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어라... 이거..."
민수가 손을 뻗어 꽃잎을 만지자, 파란색 물감이 손가락에 묻어났다.
"푸하하! 이거 누가 장난친 거잖아! 페인트칠한 거라고!"
정우도 가까이 다가가 보니 정말이었다. 누군가 흰 봉선화에 파란 페인트를 칠해놓은 것이었다.
"아...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나저나 누가 이런 장난을 쳤을까? 재미있네."
민수가 웃으며 말했다.
"저기 봐. 옆에 뭔가 써있어."
담벼락에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이렇게 적혀있었다.
'세상에 없는 꿈을 꾸는 당신에게'
"어떤 녀석이 이런 걸 했을까..."
정우가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갑자기 위에서 물방울이 떨어졌다.
"앗! 비다!"
둘은 재빨리 처마 밑으로 몸을 피했다. 그때였다. 빗물에 젖은 파란 봉선화가 서서히 본래의 하얀색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봐봐,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네."
"그러게..."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정우야."
"응?"
"너도 꿈꾸지? 세상에 없는 거..."
"그게 무슨 소리야?"
"난 알아. 네가 매일 밤 고향 생각하면서, 언젠가는 더 나은 세상이 올 거라고 믿는 거..."
정우는 말없이 빗물에 씻겨 내리는 파란색을 바라보았다.
"너도 봤잖아. 결국 페인트는 지워지고 본래 모습이 드러나는 걸..."
"하지만 민수야, 누군가는 이런 시도라도 해본 거잖아. 파란 봉선화를 만들어보겠다고..."
"그건 그렇지..."
빗소리가 점점 커져갔다. 하지만 두 사람은 쉽게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파란 물감이 완전히 씻겨 내릴 때까지.
"저기... 혹시 우리도..."
"뭐?"
"우리도 한번 해볼까? 파란 봉선화 만들기..."
민수는 잠시 놀란 듯 정우를 바라보더니, 이내 폭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너 정말... 그런데 재미있겠다! 한번 해보자!"
7장: 마음의 새 친구, 수진
정우는 도시의 찌는 듯한 더위 속에서 퀭한 눈으로 거리를 걸었다. 갑자기 누군가와 부딪혔다. 고개를 들어보니 그 앞에 미소 짓고 있는 여인이 있었다.
"수진? 수진이 맞지?"
정우는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수진은 정우의 고향 친구였고, 오랜만에 마주친 반가운 얼굴이었다.
"정우야, 정말 오랜만이다! 여기서 만날 줄이야!"
수진의 밝은 목소리에 정우의 마음도 덩달아 밝아졌다.
"그러게, 이런 곳에서 만나다니... 근데 너 왜 이렇게 땀을 흘리고 있어?"
정우가 물었다.
"아, 나? 나는 요즘 저기 공원에서 아이스크림 장사하고 있어. 오늘도 장사하러 가는 길이야."
"아이스크림 장사? 대박! 그럼 수익이 얼마나 나?"
정우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물었다.
"하하! 글쎄, 비가 오면 사업이 죽어버려!"
수진의 농담에 둘은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야, 그럼 우리 같이 갈래? 내가 네 첫 손님이 되어줄게!"
정우가 제안했다.
"좋아! 그럼 오늘은 서비스야!"
둘은 함께 공원으로 향했다. 수진의 아이스크림 카트 앞에 서자 정우는 갑자기 뭔가 떠올랐다는 듯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잠깐만, 내가 뭘 보여줄 게 있어."
정우는 주머니에서 작은 봉지를 꺼냈다. 그 안에는 파란색 물감이 들어있었다.
"이게 뭐야?"
수진이 궁금해하며 물었다.
"이거? 이건 말이지... 파란 봉선화를 만들 물감이야!"
"뭐? 파란 봉선화? 그게 무슨 소리야?"
수진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있잖아, 얼마 전에 골목에서 봤어. 누군가가 흰 봉선화에 파란 물감을 칠해놓은 거 있지? 그걸 보고 나도 한번 해보고 싶어졌어."
"아하... 근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데?"
수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 어쩌면 불가능해 보이는 꿈을 꾸는 거? 아니면 그냥 재미로?"
정우가 머쓱하게 웃었다.
"야, 너 정말 재밌는 생각을 다 하는구나. 그럼 우리 함께 해볼까?"
수진의 제안에 정우는 눈을 반짝였다.
"정말? 너도 함께 할래?"
"그럼! 재밌잖아. 근데 말이야..."
수진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갑자기 키득거렸다.
"우리 아이스크림에도 파란색을 넣어볼까? 파란 봉선화 아이스크림! 어때?"
"뭐? 그게 무슨..."
정우는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곧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좋아! 한번 해보자!"
둘은 그렇게 파란 아이스크림을 만들기 시작했다. 물론 처음에는 실패의 연속이었다. 너무 진한 파란색에 아이들은 겁을 먹고 도망가기 일쑤였다.
"아이고, 이거 원... 우리가 뭘 한 거지?"
수진이 한숨을 쉬었다.
"괜찮아, 다시 해보자. 이번엔 조금만 넣어보자."
정우가 격려했다.
그렇게 여러 번의 시도 끝에 마침내 예쁜 하늘색 아이스크림이 탄생했다.
"와, 정말 예쁘다!"
수진이 감탄했다.
"그러게. 마치 하늘에 떠 있는 구름 같아."
정우도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때였다. 한 꼬마아이가 다가와 물었다.
"아저씨, 아줌마, 저 아이스크림 뭐예요? 파란색이네요!"
"이건 말이지, 특별한 '봉선화 구름 아이스크림'이란다. 먹어볼래?"
수진이 웃으며 대답했다.
아이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아이스크림을 받아들었다. 한 입 먹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와, 정말 맛있어요! 마치 하늘을 먹는 것 같아요!"
그 말에 정우와 수진은 서로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봐, 우리가 해냈어!"
정우가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게. 불가능해 보이는 꿈도 이렇게 이뤄지는 거구나."
수진이 대답했다.
그날 이후로 '봉선화 구름 아이스크림'은 공원의 인기 상품이 되었다. 정우는 퇴근 후면 종종 수진의 가게를 찾아 함께 아이스크림을 만들었다.
그들의 웃음소리는 마치 봉선화처럼 도시의 삭막함 속에서도 아름답게 피어났다.
8장: 비 내리는 봉선화의 다짐
정우는 창밖으로 내리는 빗방울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비가 구슬프게 집안의 지붕을 두드리면서도, 그의 마음속은 오히려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봉선화가 피어있는 고향의 장독간이 떠올랐다. 어릴 적 누님과 함께 손톱에 꽃물을 들이던 날들이 다시금 그리워졌다.
"이 꽃물처럼 예쁘게 자라거라." 누님의 말씀이 귓가에 맴도는 듯했다.
정우는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기억들을 하나씩 꺼내 보았다. 고향의 바람, 봉선화의 향기, 그리고 누님의 환한 웃음. 그 순간, 정우는 확신했다. 자신은 비록 먼 곳에서 힘든 삶을 살고 있지만, 고향과 가족의 사랑은 영원하다는 것을.
"난 결코 이들을 잊지 않을 거야. 나를 짓누르는 고난 속에서도, 나는 나의 뿌리를 지킬 거야."
결심의 불꽃이 타올랐다. 정우는 잠시 침묵해 있었다. 그리고 갑작스런 결심에서 그는 일어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정우는 그 속에서 자신을 찾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나는 봉선화처럼 꿋꿋이 피어나야 한다."
그는 앞으로 나아갔다. 아프고 힘든 현실 속에서도, 봉선화처럼 아름답게 피어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빗속을 걸으며 정우는 문득 민수와 수진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들과 함께한 시간들, 특히 파란 봉선화 아이스크림을 만들었던 순간이 생각났다. 그때의 웃음소리가 마치 지금 내리는 빗소리처럼 그의 귓가를 적셨다.
"그래, 나 혼자가 아니야. 함께 꿈꾸고 함께 웃을 수 있는 친구들이 있잖아."
정우는 발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빗방울이 그의 얼굴을 적셨지만, 그는 눈을 감지 않았다. 오히려 더 크게 눈을 뜨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누님, 보고 계신가요?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힘들 때도 있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어요. 누님이 키워주신 봉선화처럼요."
빗속에서 정우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의 발걸음은 이제 더 이상 망설임이 없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의 삶이 봉선화처럼 아름답게 피어날 것이라는 것을. 비록 지금은 힘들고 고단한 날들의 연속일지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아름다운 꽃을 피울 것이라는 것을.
"봉선화야, 너도 이 비를 맞으며 자라고 있겠지? 나도 그럴 거야. 이 비를 맞으며 더 강하게, 더 아름답게 자라날 거야."
정우는 주머니에서 누님의 편지를 꺼내 들었다. 비에 젖지 않게 조심스레 품에 안으며 그는 미소 지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나는 결코 포기하지 않을 거야. 이 도시에서, 이 시대에서, 나만의 봉선화를 피워낼 거야. 그리고 언젠가... 반드시 고향으로 돌아가 누님께 그 꽃을 보여드릴 거야."
빗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정우는 깊은 숨을 내쉬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의 발걸음에는 이제 새로운 희망과 결의가 담겨 있었다. 봉선화의 꽃물처럼 선명하고 아름다운 미래를 향해, 정우는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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