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고등학생의 시간 여행기>
"야, 민준아! 또 졸고 있냐?"
선생님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나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교실 안의 모든 눈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아, 망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나는 머쓱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이번에는 용서해줄게. 하지만 다음부터는 꼭 집중해야 해. 알겠지?"
"네, 선생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수업이 끝나고 친구들이 내게 몰려왔다.
"야, 너 또 무슨 꿈꿨냐?" 현우가 물었다.
"응, 이번엔 진짜 대박이었어." 나는 흥분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또 뭔데? 설마 이번엔 공주님이랑 결혼했다고 하지 마." 지은이가 눈을 굴리며 말했다.
"아니야, 이번엔 진짜 특별해. 내가 시인이 되어서 일제강점기 때 살았던 거야."
"뭐? 일제강점기라고?" 친구들이 동시에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믿기 힘들겠지만 정말 그랬어. 내가 자세히 얘기해줄게."
--- 꿈 속 이야기 시작 ---
따뜻한 봄 햇살이 내 얼굴을 어루만지는 걸 느끼며 눈을 떴다. 주변을 둘러보니 낯선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초록빛 들판과 푸른 하늘, 그리고 흙냄새... 이건 분명 내가 알던 세상이 아니었다.
"여기가 어디지?" 나는 중얼거렸다.
그때 누군가가 내 어깨를 툭 쳤다.
"야, 또 멍때리고 있냐? 어서 일하자고."
돌아보니 낯선 청년이 호미를 들고 서 있었다. 그의 옷차림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저건... 갑옷? 아니, 아니지. 일제강점기 때 농부들이 입던 옷이잖아!
"아, 네..." 나는 어색하게 대답했다.
청년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렇게 말해? 오늘 아침부터 이상하네."
나는 급히 상황을 파악하려 노력했다. 어떻게 된 거지? 꿈인가? 아니면... 시간 여행?
"저기... 오늘이 몇 년도죠?"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청년은 날 미친 사람 보듯 쳐다봤다. "1926년이잖아. 너 어제 술 마셨어?"
1926년? 진짜 시간 여행을 한 거야? 나는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 그렇구나. 미안해요. 잠깐 헷갈렸네요."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청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호미를 내밀었다. "자, 이거 받아. 오늘은 보리밭 김매기야."
호미를 받아들고 보니 갑자기 현실감이 밀려왔다. 이게 진짜라면... 난 지금 일제강점기에 와 있는 거야. 역사 시간에 배웠던 그 시대 말이야.
보리밭으로 향하는 길, 나는 주변 풍경을 유심히 살폈다. 푸른 하늘, 초록빛 들판, 그리고 멀리 보이는 산들... 100년 전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아름다웠다.
하지만 곧 현실을 직면하게 되었다. 김매기는 생각보다 훨씬 힘들었다. 허리는 아프고, 손은 굳어갔다. 게다가 햇볕은 점점 더 뜨거워졌다.
"아, 진짜 힘들다..." 나는 중얼거렸다.
옆에서 일하던 청년이 웃으며 말했다. "힘들다고? 너 요즘 왜 이래? 평소엔 노래까지 부르면서 일했잖아."
노래라... 그래, 시인이었지. 이 시대의 '나'는 시인이었어.
"아, 맞다. 노래..." 나는 머뭇거리며 말했다.
"그래, 노래 좀 불러봐. 네 노래 들으면 힘이 난다고."
부담스러웠지만,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어...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청년의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쉿! 조용히 해. 순사들 올라올라."
나는 그제야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그래, 이 시대에 이런 노래를 부르는 건 위험한 일이지.
"미안해요. 조심할게요." 나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 나는 이 시대의 삶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힘들고 고된 농사일, 일제의 탄압, 그리고 그 속에서도 피어나는 희망...
마을에 도착하자 아이들이 우리를 반갑게 맞이했다.
"형! 오늘은 어떤 이야기 해주실 거예요?" 한 아이가 물었다.
나는 당황했지만, 이내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래, 난 시인이었지. 아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시인.
"오늘은... 봄에 대한 이야기를 해줄까?" 나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이들과 함께 마을 어귀의 나무 아래 앉았다. 나는 깊은 숨을 들이쉬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봄은 언제나 와요. 지금은 힘들고 어려운 시기지만, 봄은 반드시 올 거예요. 우리의 들에, 우리의 마음에..."
아이들의 눈이 반짝였다. 그 순간, 나는 이 시대의 '나'가 왜 시를 썼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날 밤, 나는 달빛 아래에서 시를 썼다. 내 마음속에서 울려 퍼지는 감정들을 종이 위에 쏟아냈다.
'지금은 남의 땅―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펜을 놓는 순간, 갑자기 모든 것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 꿈 속 이야기 끝 ---
"그래서 눈을 떠보니까 교실이더라고." 나는 이야기를 마쳤다.
친구들은 잠시 침묵했다가 폭소를 터뜨렸다.
"야, 너 진짜 대단하다. 어떻게 그런 꿈을 꿀 수 있냐?" 현우가 말했다.
"그러게. 근데 진짜 재밌다. 소설 같아." 지은이가 덧붙였다.
나는 씩 웃었다. "그렇지? 나도 깜짝 놀랐어."
"그런데 말이야," 잠시 생각에 잠겼던 민석이가 입을 열었다. "그 시가 진짜 그 시대에 쓰여진 거 알아? 이상화 시인이 쓴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고."
우리 모두 놀란 눈으로 민석이를 바라보았다.
"헐, 진짜?" 내가 물었다.
민석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국어 시간에 배웠잖아. 너 또 졸았구나?"
다들 다시 한번 웃음을 터뜨렸다.
그날 이후, 나는 역사와 문학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꿈속에서 경험한 그 시대의 삶이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기 때문이다.
시험 기간이 다가왔을 때, 나는 친구들에게 말했다.
"야, 이번에 역사랑 국어는 내가 책임질게."
친구들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나를 쳐다봤다.
"너가? 수업 시간에 맨날 자는 네가?" 현우가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자신 있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이제 꿈에서 배운 걸 현실에서 써먹을 때가 됐거든."
결과는 놀라웠다. 역사와 국어 시험에서 내가 반에서 1등을 했다. 선생님들도 내 갑작스러운 성적 향상에 놀라셨다.
"민준아, 어떻게 이렇게 성적이 올랐니?" 담임 선생님이 물으셨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음... 그냥 꿈에서 영감을 받았어요."
선생님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셨지만, 그냥 넘어가셨다.
그 후로 나는 종종 그 꿈을 떠올렸다. 힘들 때마다 그 시대 사람들의 강인함과 희망을 생각하며 힘을 냈다. 그리고 가끔은 혼자 중얼거리곤 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그래,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은 있어. 그걸 내게 가르쳐준 꿈이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수업 시간에 졸지 않는다. 대신 열심히 듣고, 메모하고, 질문한다. 꿈에서 만난 그 시대의 '나'처럼, 난 이제 내 삶의 시인이 되기로 했다.
힘들고 지칠 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그 어려운 시대를 살아낸 사람들처럼, 나도 이겨낼 수 있다고. 그리고 언젠가는 나만의 '봄'이 올 거라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꿈에서 깨어날 때 들었던 그 목소리를 떠올린다.
"하지만 지금은―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겼구나..."
아니야, 봄은 언제나 온다. 우리가 희망을 잃지 않는 한, 봄은 반드시 온다.
이제 난 그걸 믿는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나의 봄을 만들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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