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랑새가 머문 자리>
1. 성북동의 첫 인상과 문화적 차이의 극복 과정
제임스 킴은 브루클린에서의 마지막 아침을 맞이하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다저스 구장이 보이는 아파트에서의 일상도 이제 추억이 될 터였다. 서울행 비행기를 타기 전, 그는 자신의 이름 'James Kim'이 한글로 쓰인 명함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제임스 킴'. 아직도 어색한 이름이었다.
성북동에 도착한 첫날, 그를 맞이한 것은 예상치 못한 문화 충격이었다. "어서 오세요, 제임스 씨!" 김진수 할아버지가 90도로 허리를 굽히며 인사를 건넸다. 당황한 제임스는 어정쩡하게 고개를 숙이다가 허리를 삐끗하고 말았다. "아, 아이고..." 그의 한국어 실력은 고작 '안녕하세요'와 '감사합니다' 정도였다.
"손주며느리가 미국에서 공부했다네. 통역도 도와줄 거야." 김진수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순간, 더 큰 시련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성북동 주민협의회 환영회에서 건네받은 소주 한 잔. "어서 받으세요. 어르신께 술 한 잔 받는 건 예의죠!" 이성준이 싱글벙글 웃으며 술을 따랐다.
"아... 전 술을..." 말을 마치기도 전에 누군가 외쳤다. "우리 동네 발전을 위해 이렇게 와주신 분이 술 한 잔은 하셔야죠!" 결국 제임스는 인생 처음으로 소주를 마셨고, 그날 밤 김진수 할아버지 댁 마당에서 노래자랑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브루클린 브리지~" 그의 어설픈 노래에 주민들은 웃음보다는 따뜻한 박수로 화답해주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제임스는 한국의 정을 이해하게 되었다. 아침마다 김진수 할아버지가 건네주는 따뜻한 식혜, 이웃 아주머니들이 나눠주는 김치와 반찬들, 그리고 늘 "식사하셨어요?"라고 물어보는 인사말까지. 처음에는 부담스럽게만 느껴졌던 이런 관심들이 이제는 그의 하루를 특별하게 만드는 순간들이 되어갔다.
2. 파랑새와의 간접적이지만 깊은 교감
봄비가 내리던 어느 날 아침, 제임스는 자신의 임시 사무실 창가에서 처음으로 그 파랑새를 발견했다. 비에 젖은 날개를 털며 처마 밑으로 피신 온 파랑새는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그를 바라보았다. "너도 피난 왔니?" 제임스가 웃으며 말을 걸자, 파랑새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날 이후로 파랑새는 제임스의 일상에 조용히 스며들었다. 때로는 프로젝트 회의가 힘들 때 창가에 앉아 그를 지켜보았고, 어떤 날은 성북동 골목을 걸을 때 머리 위를 날아다니며 그의 발걸음을 따랐다. "저 파랑새가 제임스 씨 수호천사인가 봐요." 김진수의 손주 민지가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어쩌면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고 제임스는 생각했다.
특히 고향이 그리워 지붕 위에 올라가 브루클린을 그리워하던 날, 파랑새는 그의 곁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넌 원래 이곳이 집이었니?" 제임스의 물음에 파랑새는 잠시 하늘을 바라보더니 날아올라 성북동 전체를 한 바퀴 돌았다. 그 모습을 보며 제임스는 문득 깨달았다. 집이란 것은 어쩌면 머무는 곳이 아니라 마음이 닿는 곳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여름이 깊어갈수록 파랑새는 점점 더 많은 시간을 제임스의 사무실 근처에서 보냈다. 때로는 작은 나뭇가지를 물고 와서는 처마 밑에 둥지를 틀기 시작했다. "너도 이곳에 정착하기로 한 거니?" 제임스의 물음에 파랑새는 마치 대답하듯 작은 울음소리를 냈다.
3. 도시 재생 프로젝트와 공동체의 참여
"이건 좀 곤란한데요..." 이성준이 도면을 들여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전통 가옥을 모두 보존하면서 어떻게 발전을 이룰 수 있죠?" 제임스는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그의 앞에는 성북동의 미래가 담긴 도면이 펼쳐져 있었다.
"보존이 발전을 막는 게 아닙니다." 제임스가 천천히 설명을 시작했다. "이 한옥들, 보세요. 각각이 가진 이야기가 있어요. 우리는 이 이야기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들려줄 수 있습니다." 그는 도면 위에 새로운 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오래된 한옥은 그대로 두되, 내부는 현대적인 시설로 개조하는 방안이었다.
김진수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우리 동네가 가진 것들을 지키면서도 새로운 걸 만들어내는 거지." 이성준은 여전히 의문이 남은 듯했지만, 제임스의 설명을 주의 깊게 들었다. "각 가옥마다 작은 문화 공간을 만들면 어떨까요? 주민들이 직접 운영하는..."
그렇게 시작된 '성북동 이야기 프로젝트'는 점차 모습을 갖춰갔다. 오래된 한옥은 작은 박물관이 되어 성북동의 역사를 들려주었고, 비어있던 골목길은 주민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갤러리로 변신했다. 특히 매주 토요일 열리는 '성북동 장터'는 주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성북동의 새로운 명소가 되어갔다.
4. 계절의 변화와 제임스의 정체성 발견
봄부터 시작된 제임스의 성북동 생활은 계절의 변화와 함께 깊어져 갔다. 벚꽃이 흩날리던 봄날, 그는 처음으로 한복을 입어보았다. "생각보다 편하네요." 그의 말에 김진수의 손주며느리가 웃으며 답했다. "당연하죠. 수천 년 동안 입어온 옷인데요."
여름이 찾아오자 성북동은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처마 밑에 달린 풍경이 시원한 소리를 내고,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는 마치 자장가 같았다. "브루클린에선 이런 소리를 들을 수 없었죠." 제임스는 문득 자신이 향수병 대신 성북동의 일상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을이 되자 성북동은 온통 단풍으로 물들었다. 골목길을 걸을 때마다 발끝에서 들리는 낙엽 소리가 경쾌한 음악이 되었다. 이때쯤 제임스는 한국어로 간단한 대화가 가능해졌고, 김치의 맵기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진짜 한국 사람 다 됐네!" 주민들의 농담에 그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겨울이 오자 성북동은 하얀 눈으로 덮였다. 좁은 골목길은 더욱 아늑해졌고, 처마 끝에 매달린 고드름은 마치 크리스탈 장식 같았다. "눈이 이렇게 예쁘다니." 제임스는 이제 자신이 두 개의 고향을 가진 사람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5. 미래를 향한 결단과 파랑새의 새로운 둥지
프로젝트 종료일이 다가오자 제임스는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했다. 브루클린으로 돌아가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할 것인가, 아니면 성북동에 남아 이곳의 변화를 계속 지켜볼 것인가. 그의 고민을 아는지 모르는지, 파랑새는 여전히 그의 사무실 창가를 찾아왔다.
"제임스 씨, 이제 결정하셨어요?" 이성준이 조심스레 물었다. 제임스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파랑새가 이제는 둥지를 틀고 새끼들과 함께 지내는 모습이 보였다. "네, 결정했습니다. 저는 이곳에 남기로 했어요." 그의 대답에 김진수 할아버지가 환하게 웃었다.
"우리 동네가 그렇게 좋아진 거야?" 김진수가 물었다. 제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곳은 이제 제 두 번째 고향이에요. 아니, 어쩌면 진정한 첫 번째 고향일지도 모르겠어요." 그의 말에 주민들은 따뜻한 미소로 화답했다.
파랑새 가족이 둥지를 튼 것처럼, 제임스도 성북동에 자신만의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작은 한옥을 개조해 사무실 겸 주거공간으로 만들었고, 마당에는 김진수 할아버지가 직접 심어준 매화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이제 정말 성북동 사람이 다 됐네요." 이성준의 말에 제임스는 웃으며 대답했다. "네, 이제 저는 브루클린에서 온 성북동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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