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바라기의 비명>
1장: 야곱의 유언
늦은 봄날의 햇살이 병실 창가에 걸린 얇은 커튼을 통과해 들어왔다. 엘리야는 병상에 누운 아버지 야곱의 마른 손을 잡고 있었다. 평생을 시인으로 살아온 아버지는 이제 마지막 시를 쓰듯 자신의 마지막 말을 준비하고 있었다.
"엘리야야..." 야곱의 목소리는 바람에 흔들리는 보리이삭처럼 가늘었다. "내가 떠나면 무덤에 차가운 비석을 세우지 말아라. 대신 해바라기와 보리를 심어주렴. 그것이 내 마지막 소원이란다."
엘리야는 아버지의 말씀에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장례 방식과는 너무나도 다른 요청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아버지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며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아버지, 그건..." 엘리야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알고 있다, 아들아. 우리 마을의 전통과는 다르지. 하지만 내가 평생 자연과 함께 살아왔듯이, 죽어서도 자연의 품에 안기고 싶구나. 차가운 돌이 아닌, 살아 숨 쉬는 꽃들과 함께..." 야곱의 눈에는 평화로운 빛이 어렸다.
엘리야는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달빛 아래, 아버지의 말씀이 계속해서 그의 마음을 울렸다. 그는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들판을 거닐며 자연의 아름다움을 배웠던 순간들을 떠올렸다. 아버지는 항상 말씀하셨다. "자연은 우리의 가장 위대한 스승이자 영원한 동반자란다."
며칠 후, 야곱은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의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가 머물러 있었다. 엘리야는 아버지의 유언을 실현하기로 마음먹었지만, 그것은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마을의 전통을 중시하는 묘지 관리인 다니엘과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힐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장례식 날, 엘리야는 아버지의 시집을 펼쳐보았다. 그 안에는 자연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특히 마지막 페이지에 적힌 시구가 그의 눈길을 붙잡았다.
"이 땅에서 피어난 모든 것들은
우리의 이야기를 담고 있네
해바라기는 하늘을 향한 우리의 꿈이요
보리는 대지에 뿌리내린 우리의 삶이라네"
엘리야는 그제서야 아버지의 유언이 단순한 변덕이 아님을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그것은 평생을 자연과 함께한 한 시인의 마지막 시이자, 세상을 향한 마지막 메시지였다. 이제 그에게는 그 시를 완성시켜야 할 책임이 주어졌다.
2장: 교사로서의 엘리야
따스한 봄볕이 교실 창가에 비치던 오전, 엘리야는 학생들을 이끌고 학교 뒤편의 작은 정원으로 향했다. 그의 손에는 작은 모종삽과 씨앗 주머니가 들려있었다. 아이들의 호기심 어린 눈빛이 그를 따라왔다.
"선생님, 오늘은 무엇을 심나요?" 미리암이라는 소녀가 까만 눈동자를 반짝이며 물었다.
엘리야는 주머니에서 해바라기 씨앗 하나를 꺼내 보였다. "이 작은 씨앗 하나가 어떻게 하늘을 향해 자라는지 함께 지켜보자꾸나. 자연은 우리에게 가장 위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선생님이란다."
아이들은 엘리야의 지도 아래 정원 한켠에 씨앗을 심기 시작했다. 그들의 작은 손이 흙을 만지며 생명의 시작을 준비했다. 엘리야는 문득 아버지가 자신에게 처음으로 씨앗을 심는 법을 가르쳐주던 날을 떠올렸다.
"선생님, 해바라기는 정말 하늘만 보고 자라나요?" 다비드라는 남학생이 물었다.
"그렇단다. 해바라기는 태양을 따라 고개를 돌리며 자란단다. 마치 우리가 꿈을 향해 나아가는 것처럼 말이야." 엘리야의 목소리에는 아버지의 시구가 묻어났다.
수업이 끝나갈 무렵, 한나라는 여학생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선생님, 제가 어제 선생님 아버님 무덤 앞을 지나갔어요. 거기에도 해바라기를 심으실 건가요?"
엘리야의 마음이 떨렸다. 아이들의 순수한 궁금증 앞에서 그는 자신의 내면과 마주하게 되었다. "그렇단다. 아버지는 돌이 아닌 꽃으로 당신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어 하셨거든."
"왜요?" 한나가 다시 물었다.
엘리야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을 이었다. "때로는 꽃 한 송이가 천 마디 말보다 더 많은 것을 전할 수 있단다. 아버지는 돌이 아닌 살아있는 것으로 당신의 사랑을 전하고 싶으셨나 봐."
그날 저녁, 엘리야는 학교 정원의 새싹들을 돌보며 오래도록 머물렀다. 아이들과 함께한 오늘의 수업은 그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주었다. 교실에서 가르치는 지식보다, 자연을 통해 배우는 삶의 진리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다시 한번 느끼게 된 것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엘리야는 아버지의 무덤 앞에 섰다. 아직은 텅 빈 땅이었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이미 찬란한 해바라기밭이 피어나고 있었다. "아버지, 이제 저도 아버지처럼 자연을 통해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어요. 곧 이곳에도 아버지의 시처럼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어드리겠습니다."
달빛이 엘리야의 굳은 결심을 비추었다. 그의 발걸음은 이제 더욱 확신에 차 있었다. 아버지의 유언은 단순한 부탁이 아닌, 삶과 죽음을 아우르는 깊은 가르침이었음을 그는 이제야 진정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3장: 이스라엘의 기후와 물 부족 문제
이스라엘의 여름은 무자비했다. 엘리야가 아버지의 무덤 주변에 첫 해바라기 씨앗을 심은 지 한 달, 뜨거운 태양은 마른 대지를 끊임없이 달구었다. 메마른 흙은 갈라지고, 어렵게 틔운 새싹들은 시들어가기 시작했다.
"이러다간 모든 것이 말라죽고 말 거야." 엘리야는 무덤 앞에 쪼그리고 앉아 갈라진 땅을 어루만졌다. 마을의 물 저장고는 바닥을 보이고 있었고, 주민들은 이미 식수 배급을 시작한 상태였다.
그때 묘지 관리인 다니엘이 다가왔다. "젊은이, 이제 그만두는 게 어떻겠나? 이 땅에서 해바라기를 키우겠다는 건 신의 뜻을 거스르는 일일지도 모르네."
엘리야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포기할 수 없습니다. 이곳은 우리 선조들이 사막을 옥토로 일궈낸 땅이에요. 저도 할 수 있습니다."
그날 밤, 엘리야는 오래된 농사 일지들을 뒤적였다. 이스라엘 농부들이 수천 년간 이 척박한 땅에서 작물을 길러온 지혜를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다 그는 한 구절을 발견했다.
"물이 부족할 때는 돌을 활용하라. 돌은 밤의 이슬을 모아 식물의 뿌리를 적신다."
다음 날부터 엘리야는 해바라기 모종 주변에 조약돌을 깔기 시작했다. 또한 그는 학교에서 배운 현대적인 관개 기술을 접목시켰다. 빗물을 모을 수 있는 작은 도랑을 파고, 물이 쉽게 증발하지 않도록 짚으로 지면을 덮었다.
"선생님, 저도 도와드릴게요!" 어느 날 한나가 친구들과 함께 찾아왔다. 아이들은 엘리야가 만든 도랑에 조개껍데기를 깔아주었다. "이렇게 하면 물이 천천히 스며들 거예요. 과학 시간에 배웠어요!"
점점 더 많은 학생들이 방과 후에 찾아왔다. 그들은 각자 집에서 남은 물을 조금씩 가져왔다. 작은 물방울들이 모여 해바라기의 생명을 이어갔다.
한낮의 더위를 피해 새벽부터 일하던 어느 날, 엘리야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조약돌 위에 맺힌 이슬이 햇살에 반짝이고 있었고, 그 물기를 빨아들인 해바라기는 조금씩 고개를 들고 있었다.
"보셨나요, 아버지? 당신의 해바라기들이 자라고 있어요." 엘리야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라헬이 그를 찾아왔다. "네 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참 자랑스러워하셨을 거야. 이스라엘의 땅은 척박하지만, 그만큼 생명의 의지도 강하단다."
더위와 가뭄은 계속되었지만, 엘리야의 해바라기들은 꿋꿋이 자라났다. 때로는 시들고, 때로는 쓰러졌지만, 그때마다 다시 일어섰다. 마치 이 땅의 역사처럼, 끈질기게 생명을 이어갔다.
어느 날 새벽, 다니엘이 조용히 무덤가를 찾았다. 그는 말없이 물통을 들고 와 해바라기에 물을 주기 시작했다. 엘리야는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척박한 땅에서 피어나는 생명의 기적은 이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가고 있었다.
4장: 묘지 관리인 다니엘과의 갈등
한여름의 오후, 다니엘은 묘지를 순찰하다 걸음을 멈췄다. 야곱의 무덤 주위로 자라난 해바라기들이 전통적인 묘지의 경관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의 얼굴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이건 옳지 않아." 다니엘은 중얼거렸다. 40년간 묘지를 관리해온 그에게, 이런 파격적인 변화는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그날 오후, 다니엘은 엘리야를 자신의 관리실로 불렀다. "자네가 한 일이 얼마나 위험한 선례가 될 수 있는지 알고 있나?"
엘리야는 조용히 앉아 다니엘의 말을 경청했다.
"우리 선조들은 수천 년간 같은 방식으로 고인들을 기렸네. 돌비석은 영원함의 상징이야. 하지만 자네는... 시들어 없어질 꽃으로 그걸 대신하려 하고 있어."
"다니엘 어르신," 엘리야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는 전통을 무시하려는 게 아닙니다. 다만 아버지의 마지막 소원이..."
"개인의 소원이 공동체의 질서보다 더 중요하단 말인가?" 다니엘이 날카롭게 끊었다.
침묵이 흘렀다. 창밖으로 해바라기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보였다.
"어르신께 한 가지 여쭙고 싶습니다." 엘리야가 다시 말을 이었다. "왜 우리는 비석을 세우나요?"
"그건 당연히..." 다니엘이 말을 멈췄다.
"고인을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차가운 돌이, 생명이 깃든 꽃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해줄 수 있을까요? 매일 아침 태양을 향해 고개를 드는 해바라기가, 계절의 변화와 함께 시들었다 다시 피어나는 보리가, 아버지의 삶과 사랑을 더 잘 전하지 않을까요?"
다니엘의 표정이 조금씩 변화했다. 그는 창밖의 해바라기들을 바라보았다. 노란 꽃잎들이 마치 작은 태양들처럼 빛나고 있었다.
"자네 아버지... 야곱 씨는 특별한 분이었지." 오랜 침묵 끝에 다니엘이 말했다. "늘 자연과 함께 살았고, 그의 시는 우리 마을에 큰 위안이 되었어..."
"그래서 저는..." 엘리야가 말을 잇기도 전에, 마을 주민들이 묘지 관리실로 몰려들었다.
"다니엘 어르신! 야곱의 무덤에서 자라는 해바라기들이 다른 묘지에도 씨앗을 퍼뜨리고 있습니다! 이대로 두면 모든 묘지가..."
다니엘의 눈이 커졌다. 그는 엘리야를 바라보았다. 젊은 교사의 눈에는 당혹감과 함께 희미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아버지의 시가 전해지고 있나 봅니다." 엘리야가 조용히 말했다.
다니엘은 한숨을 쉬었다. "자연의 섭리를 거스를 순 없구나... 하지만 이건 큰 문제가 될 수 있어. 우리가 어떤 해결책을 찾아야 할 거야."
그날 밤, 엘리야는 아버지의 무덤 앞에 앉아 있었다. 달빛 아래 해바라기들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그들의 존재만으로도 무덤은 생명력으로 가득했다.
"아버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신의 시가 이렇게 멀리 퍼져나가길 바라셨나요? 아니면 이것도 당신이 계획하신 것인가요?"
달빛이 구름 사이로 스며들었다. 그때 엘리야의 귓가에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아버지의 목소리처럼 부드럽고 따뜻한 속삭임이었다.
5장: 라헬의 이야기와 야곱의 시
늦은 여름의 저녁, 라헬은 엘리야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오래된 목조 주택의 현관에는 말린 허브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고, 창가에는 야곱이 생전에 좋아하던 제비꽃이 피어 있었다.
"차 한잔 하렴." 라헬은 민트향 나는 차를 엘리야 앞에 내려놓았다. 그녀의 주름진 손가락이 찻잔을 어루만졌다. "네 아버지와 나는 50년 지기였단다. 그가 처음 이 마을에 왔을 때부터 지켜봐왔지."
라헬은 낡은 가죽 가방을 꺼내왔다. 그 안에는 오래된 노트 한 권이 들어있었다. "이건 네 아버지가 내게 맡긴 거야. '때가 되면 엘리야에게 전해달라'고 하셨지."
엘리야는 조심스럽게 노트를 펼쳤다. 첫 페이지에는 아버지의 낯익은 필체로 쓰인 시가 있었다.
"해바라기여, 너는 내 영혼의 거울
아침이면 동쪽을 향해 고개 들고
저녁이면 서쪽 하늘을 그리워하나니
너의 삶이 곧 나의 기도이어라
보리여, 너는 내 생의 증인
봄바람에 푸르게 일렁이고
가을 햇살에 황금빛으로 물들어
대지의 숨결을 전하는구나
내가 떠난 뒤에도
이 꽃과 이 이삭들이
나의 사랑을 이야기하리라
돌에 새긴 글자보다
더 깊이, 더 오래도록..."
엘리야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 시를... 왜 이제서야..."
라헬이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네가 준비될 때까지 기다렸단다. 네 아버지는 늘 말씀하셨어. '진정한 이해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그녀는 창 밖을 바라보았다. "야곱은 특별했어. 그는 자연이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를 담는 그릇이라고 믿었지. 해바라기와 보리는 그의 시에서 단순한 식물이 아니었어. 그것들은 삶과 죽음, 사랑과 그리움을 이야기하는 언어였단다."
라헬은 노트를 더 넘겼다. 거기에는 야곱이 매일매일 기록한 자연 관찰 일지가 있었다. 해바라기가 피어나는 모습, 보리가 자라는 과정, 새들이 날아가는 방향까지... 그의 시선은 자연의 모든 순간을 담고 있었다.
"보렴." 라헬이 특별한 페이지를 가리켰다. "이건 네가 태어난 날 쓰신 거야."
"아들아, 오늘 너는
이 땅의 새로운 봄이 되었구나
해바라기처럼 빛을 향해 자라다오
보리처럼 깊이 뿌리내리거라
너의 삶이 시가 되기를..."
엘리야는 글자 하나하나를 손끝으로 더듬었다. 잉크는 바랬지만, 그 속에 담긴 아버지의 마음은 여전히 선명했다.
"아버지는 늘 네가 자신의 마지막 시가 될 거라고 하셨어." 라헬이 말했다. "네가 심은 해바라기들, 그건 단순한 꽃이 아니란다. 그것은 네 아버지의 사랑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방식이지."
밤이 깊어갔다. 창 밖으로 별들이 깊어지는 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엘리야는 이제 이해했다. 아버지의 유언은 단순한 부탁이 아닌, 그의 마지막 시였다. 그리고 지금, 그 시는 자신을 통해 계속해서 써져가고 있었다.
6장: 계절의 변화와 엘리야의 내적 성장
가을의 문턱에 선 9월, 엘리야의 해바라기들은 절정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키 큰 줄기 끝에 달린 노란 꽃들은 마치 작은 태양들처럼 빛났고, 그 사이사이로 심은 보리는 황금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아침 일찍 무덤을 찾은 엘리야는 해바라기들 사이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지난 봄, 그가 첫 씨앗을 심었을 때만 해도 이렇게 장관을 이룰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척박했던 땅은 이제 생명력 넘치는 정원이 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어요, 아버지." 엘리야가 중얼거렸다. "왜 하필 해바라기였는지, 왜 보리였는지... 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아요."
그는 한 해바라기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꽃잎 하나가 바람에 흔들려 떨어졌다. 시들어가는 것을 보며 엘리야는 웃음 지었다. 이제는 자연의 순환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만난 한나가 물었다. "선생님, 해바라기가 시들어가요. 슬프지 않으세요?"
엘리야는 고개를 저었다. "꽃이 지는 건 끝이 아니란다. 해바라기는 수많은 씨앗을 남기고, 그 씨앗들은 다시 봄이 오면 새로운 꽃을 피울 거야."
"마치 선생님 아버님의 이야기처럼요?" 한나의 질문에 엘리야는 깊이 감동했다.
"그래, 정확히 그렇단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은 형태를 바꾸어 계속 살아가는 거야."
저녁 무렵, 엘리야는 해바라기들 사이에서 일기를 썼다. 아버지처럼 자연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습관이 생긴 것이다.
"오늘따라 해바라기들의 고개 숙임이 깊다. 마치 기도하는 것처럼. 아니, 어쩌면 이것이 진정한 기도일지도 모른다. 자연과 하나 되어 순환하는 이 모든 순간이..."
쌀쌀한 바람이 불어오자 엘리야는 재킷의 칼라를 세웠다. 계절은 변하고 있었다. 그는 이제 그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속에서 더 깊은 의미를 발견하게 되었다.
"봄에는 희망을 심고, 여름에는 인내를 배우고, 가을에는 감사를 하고, 겨울에는 기다림을 배우는 거구나, 아버지."
해 질 녘, 엘리야는 무덤 주위를 정리했다. 떨어진 꽃잎들을 모아 흙으로 덮어주었다. 그것들은 다시 땅의 일부가 되어 새로운 생명을 키워낼 것이다.
그때 다니엘이 찾아왔다. 노인은 말없이 엘리야의 작업을 지켜보다가 말했다. "자네는 많이 변했어."
엘리야가 고개를 들었다.
"처음에는 그저 아버지의 유언을 지키려 애쓰는 완고한 젊은이였지. 하지만 이제는... 자네 안에서 야곱의 지혜가 자라나고 있는 게 보이네."
엘리야는 감사의 눈길로 다니엘을 바라보았다. "저도 많이 배웠습니다. 꽃을 키우면서 제 영혼도 자라났거든요."
달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해바라기들은 이제 서쪽 하늘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마치 하루를 마무리하는 작별 인사처럼.
7장: 다니엘과 마을 공동체의 변화
초가을이 깊어갈 무렵, 엘리야의 해바라기와 보리밭은 마을 사람들의 화제가 되었다. 처음에는 엘리야의 선택을 탐탁지 않게 여겼던 사람들도, 무덤 주변에 꽃과 곡식이 가득 찬 광경을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마을의 어르신들은 묘지에 돌 대신 꽃이 피어나는 것이 공동체의 전통을 해치는 일이라고 우려했지만, 그들조차 이 새로운 변화에 호기심과 경외심을 느끼기 시작했다.
어느 날 아침, 마을의 여성들이 엘리야의 해바라기밭에 물을 주기 위해 줄지어 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집에서 물을 조금씩 가져와 해바라기와 보리밭에 물을 주며 한 손 한 손 정성스럽게 꽃잎을 쓰다듬었다. 다니엘도 그 무리에 속해 조용히 물을 부으며 해바라기의 씨앗이 자라나길 도왔다.
엘리야는 점점 마을 사람들이 해바라기밭을 마치 아버지 야곱의 시가 살아 있는 장소처럼 여기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이곳은 단순한 묘지가 아닌, 마을 공동체가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상징이 되었다.
다니엘은 해바라기밭을 찾은 마을 어르신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엘리야의 결정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묘지를 돌이 아닌 꽃과 곡식으로 둘러싼다는 것은 새로운 전통을 만든다는 것을 의미했다. 전통에 대한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던 다니엘은 이 변화가 공동체에 미칠 영향을 깊이 고민하게 되었다.
그날 저녁, 다니엘은 엘리야를 불러 대화의 자리를 마련했다. 둘은 무덤 주변에 앉아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오래도록 침묵을 지켰다.
"처음엔 네가 아버지의 유언을 따르는 것이 공동체의 전통을 위협하는 것 같아 걱정스러웠다," 다니엘이 조용히 말을 꺼냈다. "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구나. 전통이란 것도 결국 사람의 손길과 마음으로 이어지는 것이지."
엘리야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도 처음에는 아버지의 유언이 우리 마을의 전통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이 해바라기와 보리밭이 자라면서 아버지의 철학을 이해하게 됐어요. 자연과 하나 되어 살아가는 것, 그것이 아버지가 남기고자 했던 메시지였으니까요."
"야곱은 참 특별한 사람이었지. 그의 시와 철학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줄은 몰랐네." 다니엘의 눈에 온화한 미소가 번졌다.
해가 완전히 지고, 어둠 속에서 달빛이 해바라기밭을 부드럽게 감싸기 시작했다. 다니엘과 엘리야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들 사이에는 묘지와 해바라기밭을 둘러싼 깊은 공감이 흐르고 있었다. 그날 이후, 다니엘은 엘리야의 해바라기밭을 돌보는 마을 사람들을 독려하며 새로운 공동체의 전통이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8장: 해바라기의 비명 – 자연 속에 울려 퍼지는 소망
가을이 깊어가며 해바라기와 보리는 이제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엘리야는 무덤 앞에 앉아, 아버지의 해바라기들이 지고 새로운 씨앗을 맺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동안 해바라기와 보리의 순환을 지켜보면서 엘리야는 자연이 그 자체로 삶의 순환을 보여준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아버지의 무덤에 놓인 해바라기들 사이로 걸음을 옮기며 가만히 중얼거렸다. “이 꽃들이 시들어도, 그 씨앗들이 또 다른 생명을 피워내겠지요. 아버지의 시처럼요.”
그 순간 마을 사람들, 아이들, 그리고 다니엘이 하나둘씩 엘리야의 주위로 모여들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저 해바라기와 보리의 씨앗을 나누며 자연의 생명력이 어떻게 이어지는지 지켜보았다. 한나와 아이들은 해바라기 씨앗을 하나씩 모아 그들만의 작은 정원을 만들 계획을 세웠다.
다니엘은 잠시 엘리야에게 다가와 어깨를 두드리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을 사람들 모두가 해바라기와 보리가 주는 생명력에 깊은 감동을 받았고, 이 순간, 해바라기밭은 마을의 상징이 되어 있었다.
해가 저물고, 달빛이 무덤을 비추자 엘리야는 아버지 야곱의 시가 마을 사람들 속에 살아 있음을 느꼈다. 해바라기의 비명은 단순한 울림이 아니었다. 그것은 아버지가 남긴 사랑과 생명에 대한 깊은 목소리였고, 이제 그 소리는 마을과 자연 속에 영원히 머물러 있었다.
엘리야는 비로소 아버지의 마지막 소망을 온전히 이해하며, 이곳에 새겨진 시가 앞으로도 계속 자라나리라는 것을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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