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ort story) 푸른 물결, 붉은 마음

<푸른 물결, 붉은 마음>

 

창가에 앉아 강물을 바라보며, 나는 옛 추억에 잠깁니다. 푸른 강물과 강가의 강낭콩 꽃은 그때의 기억을 생생하게 떠올리게 합니다. 서랍에서 꺼낸 낡은 일기장을 펼치자, 고등학교 시절의 이야기가 물밀듯이 밀려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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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5일, 맑음

 

고등학교 2학년의 시작. 새 학기의 설렘보다는 겨울방학의 여운이 더 강하게 남아있습니다. 특히 방학 동안 우연히 만났던 그녀를 잊을 수가 없어요. 양귀비꽃처럼 붉은 입술, 나비의 더듬이처럼 섬세한 눈썹... 그녀의 모습이 자꾸만 떠오릅니다.

 

그런데 첫날부터 황당한 일이 벌어졌어요. 학교에서 새로운 규칙을 만들었대요. 모든 학생이 돌아가며 화장실 청소를 해야 한다니! 엄마가 사준 '탑스텝고농축세탁세제'를 들고 등교했는데, 하필 제가 첫 당번이 되었어요.

 

"야, 김철수! 너 오늘 당번이잖아. 빨리 가서 청소해!"

 

친구들의 놀림에 얼굴이 붉어졌지만, 어쩔 수 없이 화장실로 향했습니다.

 

청소를 하면서 친구들의 대화가 들려왔어요.

 

"이거 진짜 말도 안 되는 규칙 아냐?" 민수가 불만스럽게 말했어요.

"그래도 우리가 사용하는 공간은 우리가 깨끗이 해야지." 영희가 반박했죠.

"난 오히려 좋아. 책임감도 기르고 평등한 것 같아." 수진이의 의견이었어요.

 

각자의 생각이 달랐지만, 모두 나름의 이유가 있어 보였어요. 문득 '과연 옳고 그름의 기준은 무엇일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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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0일, 흐림

 

오늘 국어 시간에 선생님께서 읽어주신 구절이 자꾸 머릿속을 맴돕니다.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이 말이 왜 이리 가슴에 와닿는지 모르겠어요. 그녀에 대한 내 마음이 이런 걸까요?

 

그런데 웬일인지 또 화장실 청소 당번이 되었어요. 이번엔 '은나노자몽세제'를 들고 씩씩하게(?) 화장실로 향했죠. 그런데 그 순간, 꿈에 그리던 그녀와 마주쳤어요!

 

"어머, 너 청소 당번이야? 힘내!"

 

그녀의 미소에 넋을 잃고 세제통을 떨어뜨리고 말았어요. '쾅' 소리와 함께 세제가 바닥에 쏟아졌죠. 얼굴이 새빨개져서 어쩔 줄 몰랐어요. 그녀가 웃으며 말했어요.

 

"괜찮아, 내가 도와줄게."

 

그렇게 우리는 함께 바닥을 닦았어요. 손이 스치기도 하고, 눈이 마주치기도 하면서 어색하지만 설레는 시간을 보냈죠.

 

"너는 이런 청소 당번 제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그녀가 물었어요.

"글쎄... 처음엔 싫었는데, 이렇게 너와 대화할 기회가 생기니 나쁘지 않은 것 같아."

그녀는 웃으며 말했어요. "그래, 나도 처음엔 반대했는데 이제는 의미 있다고 생각해. 우리가 사회에 나가기 전에 책임감을 배우는 거랄까?"

 

그녀의 말을 들으니, 제 생각도 조금씩 바뀌는 것 같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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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5일, 비

 

오늘은 전교생이 모여 대청소를 하는 날이에요. '탑스텝먼지세탁세제'를 들고 체육관으로 갔는데, 그녀도 거기 있었어요! 우리는 나란히 서서 체육관 바닥을 닦기 시작했어요.

 

"저번에 고마웠어, 나 혼자 청소하게 도와줘서."

"아니야, 당연한 거지. 근데 너 왜 자꾸 청소 당번이 돼?"

 

우리는 웃으며 이야기를 나눴어요. 그런데 갑자기 미끄러운 바닥 때문에 균형을 잃었고, 그만 그녀에게 기대고 말았어요.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워진 그 순간, 심장이 터질 것 같았죠.

 

"미안해!" 급히 몸을 일으키며 말했어요.

그녀는 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숙였어요. "괜찮아..."

 

그 순간, 우리 사이에 무언가가 달라진 것 같았어요.

 

청소가 끝난 후, 친구들과 모여 이야기를 나눴어요.

 

"야, 너희 둘 사이에 뭔가 있는 것 같은데?" 민수가 놀리듯 말했어요.

"아니야, 그냥 친구사이야." 제가 부인했지만, 얼굴은 이미 빨개져 있었죠.

"근데 철수야, 너 요즘 많이 달라진 것 같아." 영희가 말했어요.

"그러게, 예전엔 항상 불평만 했는데 이제는 뭔가 달라 보여." 수진이도 동의했어요.

 

친구들의 말을 들으니, 제가 정말 변하고 있다는 걸 느꼈어요. 그리고 그 변화의 중심에 그녀가 있다는 것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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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5일, 맑음 후 흐림

 

드디어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학교 축제를 같이 즐기자고 제안했어요. 놀랍게도 그녀는 흔쾌히 승낙했죠!

 

손을 잡고 축제장을 돌아다니는 동안,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어요. 하지만 갑자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고, 우리는 급히 체육관으로 뛰어들어갔어요.

 

빗물에 젖은 그녀의 머리카락이 석류 씨앗처럼 반짝였어요.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죠. 우리의 입술이 거의 닿을 듯 말 듯한 그 순간...

 

"야! 김철수! 일어나!"

 

현실로 돌아오니 선생님의 호통 소리였어요. 수학 시간에 졸다 들킨 거죠. 온 반 아이들이 키득거리며 절 바라보고 있었어요. 아, 이 난감한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하나...

 

그날 방과 후, 그녀가 절 불렀어요.

"아까 수업 시간에 무슨 꿈 꿨어? 내 이름을 부르던데."

얼굴이 확 달아올랐어요. "아, 그게... 미안해."

그녀는 웃으며 말했어요. "괜찮아. 나도 가끔 너 생각하면서 멍 때리거든."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어색하게 웃었어요.

 

"근데 철수야, 너 요즘 공부는 어때? 성적 관리 잘하고 있어?" 그녀가 물었어요.

"음... 사실 좀 걱정돼. 너무 네 생각만 하다 보니까..." 솔직하게 대답했어요.

그녀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어요. "그래도 우리 미래를 위해서 공부도 중요하지 않을까?"

 

그 말을 듣고 갑자기 죄책감이 들었어요. 사랑도 중요하지만, 현실적인 부분도 놓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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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일, 맑음

 

노동절이라 학교에 가지 않는 날이에요. 엄마의 심부름으로 마트에 갔는데, 그녀를 만났어요. 그녀도 엄마 심부름을 왔대요.

 

'주방세제자몽', '리모컨비데', '필립스안전커버5구멀티탭', '차량용방향제', '식기건조대', '배변패드'... 우리는 서로의 물건을 나눠 들고 집으로 향했어요.

 

걸어가는 동안 우리는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어요.

 

"너는 앞으로 뭐가 되고 싶어?" 제가 물었어요.

"음... 난 의사가 되고 싶어.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하고 싶거든. 너는?"

"난 아직 잘 모르겠어. 그냥 네 옆에 있으면 될 것 같아."

그녀는 살짝 찡그리며 말했어요. "그래도 너만의 꿈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그 말을 듣고 생각에 잠겼어요. 사랑만으로는 부족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죠.

 

집 앞에 도착해서 작별 인사를 나누려는 찰나, 그녀가 불쑥 말했어요.

 

"저기... 나 너 좋아해. 하지만 우리 둘 다 각자의 꿈을 위해 노력했으면 좋겠어."

 

순간 심장이 멎는 줄 알았어요. 기쁨과 동시에 책임감도 느껴졌죠. 용기를 내어 대답했어요.

 

"나도... 너를 좋아해. 그리고 네 말이 맞아. 우리 함께 성장해 나가자."

 

그 순간, 우리의 입술이 닿았어요. 양귀비꽃보다 더 붉은 그녀의 입술. 그 키스는 달콤하면서도 쌉싸름했어요. 미래에 대한 설렘과 불안이 공존하는 맛이었죠.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 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문득 국어 시간에 배운 시구가 떠올랐어요. 지금의 이 순간이 바로 그 시의 의미가 아닐까요? 푸른 희망과 붉은 열정이 공존하는 우리의 모습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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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을 덮으며 나는 미소 짓습니다. 그 시절의 풋풋했던 사랑, 그리고 지금의 우리. 창밖으로 보이는 강물처럼 우리의 사랑도 여전히 푸르고 깊습니다. 하지만 그 시절과는 다른 깊이와 넓이를 가지고 있죠.

 

그녀가 방으로 들어오며 말합니다. "여보, 뭐해요? 아직도 그 낡은 일기장을 보고 있어요?"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대답합니다. "응, 우리의 이야기를 다시 읽고 있었어. 그때는 모든 게 단순해 보였는데, 지금 보니 우리가 정말 많이 성장했더라고."

 

그녀는 미소 지으며 내 곁에 앉습니다. "그러게요. 그때는 사랑만 있으면 다 될 것 같았는데,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더라고요."

 

우리는 함께 창밖을 바라봅니다. 강낭콩 꽃보다 더 푸른 강물 위로 석양이 물들고 있습니다. 그 모습이 마치 우리의 사랑처럼 아름답습니다.

 

"여보," 그녀가 말합니다. "우리 딸 방학 숙제로 화장실 청소하래요. 뭔가 익숙하지 않아요?"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웃음을 터뜨립니다.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는 게 참 감사하네요.

 

"그때 우리가 화장실 청소하면서 처음 가까워졌잖아." 내가 말합니다.

"맞아요. 처음엔 정말 싫어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배운 게 참 많아요." 그녀가 대답합니다.

 

우리는 잠시 과거를 회상하며 침묵에 빠집니다. 그때 배운 책임감, 협동심, 그리고 다양한 관점을 존중하는 태도가 지금의 우리를 만들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보, 우리 딸에게 뭐라고 말해줘야 할까요?" 그녀가 물어봅니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깁니다. "글쎄... 청소가 귀찮고 힘들 수 있지만, 그 속에서 배울 수 있는 게 많다고 말해주면 어떨까? 그리고 다른 친구들의 생각도 들어보라고 하고."

 

그녀가 고개를 끄덕입니다. "맞아요. 그리고 꿈을 향해 노력하는 것의 중요성도 알려주면 좋겠어요. 우리처럼요."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 짓습니다. 그때 우리가 각자의 꿈을 위해 노력하기로 한 결정이 지금의 우리를 만들었습니다. 나는 작가가 되어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글을 쓰고, 그녀는 의사가 되어 사람들의 몸을 치료합니다.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문득 그 시구가 다시 떠오릅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구절이 의미하는 게 뭔지 조금은 알 것 같아." 내가 말합니다.

"뭔데요?" 그녀가 궁금해합니다.

"우리가 가진 정의감과 열정... 그게 우리를 지금까지 이끌어온 거 같아. 사랑도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던 거지."

 

그녀가 내 손을 꼭 잡습니다. "맞아요. 우리의 사랑이 더 깊어지고 성숙해질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에요."

 

창밖으로 노을이 더욱 짙어집니다. 강물은 이제 강낭콩 꽃보다 더 푸르고, 우리의 마음은 양귀비 꽃보다 더 붉습니다. 하지만 그 색깔들은 이제 단순한 열정이나 순수함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 속에는 시간이 가져다준 깊이와 성숙함, 그리고 다양한 경험들이 녹아있습니다.

 

"여보," 내가 말합니다. "우리가 걸어온 길이 쉽지만은 않았지만, 지금 이 순간 당신과 함께여서 정말 행복해요."

"나도요," 그녀가 대답합니다.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며 여기까지 왔다는 게 자랑스러워요."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 짓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맞춥니다. 이 키스는 고등학교 때의 그것과는 달랐습니다. 더 깊고, 더 성숙하고, 더 많은 의미를 담고 있었죠.

 

"자, 이제 가서 딸에게 이야기해줄까요?" 그녀가 제안합니다.

"그래요. 우리의 경험이 딸에게도 도움이 되길 바라요." 내가 대답합니다.

 

우리는 손을 잡고 딸의 방으로 향합니다. 창밖으로 보이는 강물처럼, 우리의 삶도 계속해서 흘러갈 것입니다. 때로는 잔잔하게, 때로는 거세게.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 모든 순간이 우리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간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는 믿습니다. 우리의 딸도, 그녀만의 강물을 따라 흐르며 자신만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들어갈 것이라고.

 

 

 

푸른 물결, 붉은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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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변영로, <논개> (tistory.com)

시) 변영로, <논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