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의 길을 걷는 나그네, 수미>
# 1장: 서막 - 떠나는 수미
"아, 진짜 미치겠네."
수미는 휴대폰을 가방 깊숙이 집어넣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마지막으로 걸려온 전화는 회사 동료였다. 갑자기 사표를 던지고 떠난다는 그녀를 걱정하는 목소리였지만, 귀에는 그저 잔소리로만 들렸다.
"수미야, 너 정말 괜찮은 거 맞아? 그래도 우리 회사가..."
"아니, 전 정말 괜찮아요. 오히려 지금이 제일 좋네요."
마지막 통화를 끝내고 수미는 어깨에 걸친 낡은 배낭을 고쳐 맸다. 이 배낭은 대학생 때 산 것으로, 지난 10년간 옷장 구석에서 먼지만 뒤집어쓰고 있었다. 터미널에 도착하자 방송이 울려 퍼졌다.
"남도행 버스 곧 출발합니다."
창가에 기대앉은 수미는 피식 웃었다. 사람들은 다들 미쳤다고 했다. 연봉 좋은 회사를 때려치우고, 남도의 시골길을 홀로 걷겠다는 그녀를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수미는 알고 있었다. 매일 아침 거울 속에서 마주치는 그 공허한 미소가, 얼마나 자신을 갉아먹고 있었는지.
버스가 출발하고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도시의 풍경을 바라보며 수미는 중얼거렸다.
"이제 진짜 웃고 싶어서 웃는 날이 올까?"
핸드폰이 다시 울렸지만, 이번에는 전원을 꺼버렸다. 도시의 소음이 멀어질수록 가슴 한켠이 묘하게 간질거렸다. 두렵지만 설레는, 그런 느낌이었다.
"아, 맞다. 양말을 더 가져올걸."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수미는 피식 웃었다. 이제 와서 무슨 양말타령이냐며 스스로를 놀리면서도, 이런 사소한 걱정거리가 오히려 편안하게 느껴졌다. 적어도 실적과 마감에 대한 걱정보다는 말이다.
버스는 굽이진 국도를 따라 남도로 향했고, 수미의 인생에서 가장 긴 여행이 시작되었다.
# 2장: 외줄기 길에서의 첫 만남
햇살이 따갑게 내리쬐는 오후, 수미는 밀밭 사이로 난 좁은 길을 걷고 있었다. 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아, 진짜... 에어컨 있는 사무실이 그리워질 줄이야."
투덜거리며 걷던 그때였다. 앞쪽 밀밭 사이로 한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허름한 차림의 나그네였다.
"저기요!"
무심코 부른 목소리에 나그네가 돌아보았다. 마흔 중반쯤 되어 보이는 수수한 얼굴이었다.
"혹시... 이 길이 맞나요? 저기 저 마을까지 가는..."
말을 멈춘 이유는 나그네가 지어 보인 미소 때문이었다. 왠지 모를 친근함이 묻어나는 미소였다.
"길이 맞나 물으시는데, 어떤 게 맞는 길인지는 어떻게 아시나요?"
"네?"
"당신이 가고 싶은 곳이 어딘지도 모르시면서."
수미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나그네는 그저 빙그레 웃으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저기... 잠깐만요!"
나그네가 다시 돌아보자 수미는 머쓱해졌다. 사실 부를 말이 없었다. 그저 이 낯선 이의 등이 사라지는 게 싫었을 뿐이었다.
"혹시... 같이 걸을까요?"
나그네는 대답 대신 걸음을 늦추었다. 수미는 그것을 허락으로 받아들이고 옆에 따라붙었다.
"근데 정말 더워요. 어떻게 이런 날씨에..."
"사무실이 그리우신가 보네요."
"엥? 어떻게 아셨어요?"
"방금 전에 혼잣말하시던데요."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자신의 투덜거림을 들었다니.
그렇게 시작된 첫 만남은, 나중에 돌아보면 운명 같은 것이었다.
# 3장: 주막에서 만난 할머니
"아이고, 세상에! 이런 날씨에 어쩔 건가."
주막 문을 열자마자 할머니의 걱정 섞인 목소리가 수미를 반겼다. 비는 갑자기 쏟아지기 시작했고, 수미의 옷은 이미 흠뻑 젖어있었다.
"괜찮아요, 할머니. 제가 원래 물과 친해서..."
"아이고, 말도 않되는 소리 말고 어서 들어와. 옷부터 갈아입어야겠네."
할머니는 수미를 안쪽 방으로 이끌었다. 낡은 장롱에서 꺼낸 할머니의 옛날 한복 치마는 뜻밖에도 수미의 체형에 딱 맞았다.
"어머, 할머니. 제가 입어도 될까요?"
"그럼, 내 젊었을 때 꼭 너만했어. 근데 아가... 머리는 왜 그리 짧게 잘랐어?"
"아, 이거요? 회사 때려치고 나올 때 기분 전환 겸 잘랐어요."
"회사를? 때려치고?"
"네. 때려치고 왔죠. 제 인생에서 처음으로 뭔가를 때려쳐봤어요."
할머니는 잠시 수미를 바라보다가 폭소를 터뜨렸다.
"아이고, 우리 손녀래도 이런 말은 못 들어봤네. 근데 말이야, 나도 젊었을 때 한 번 때려쳐봤어야 했는데..."
한숨 섞인 할머니의 말에 수미는 귀가 솔깃해졌다.
"할머니도 때려치고 싶은 게 있으셨어요?"
"그렇지... 내 첫사랑, 그 양반 말이야."
할머니는 묵은 김치를 꺼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사람, 지금의 할아버지가 아니야. 내가 스무 살 때 만난 사람이었지. 어찌나 멋있었던지..."
"어머, 할머니도 첫사랑이 있으셨다니!"
"그래, 근데 말이야. 그 사람, 결국 서울로 가버렸어. 나는 여기 주막을 지켜야 한다고, 그렇게 바보같이 놓아보냈지."
수미는 할머니가 내어준 묵은지를 씹으며 이야기를 들었다. 묵은지의 맛처럼 시큼하면서도 깊은 맛이 나는 이야기였다.
"근데 할머니, 후회되진 않으세요?"
"후회? 있지... 없지... 뭐 그런 거지."
할머니는 씩 웃으며 소주잔을 꺼냈다.
"인생이란 게 말이야, 때려치든 붙잡든... 다 그렇게 살아지는 거야."
# 4장: 구름에 가려지는 달
그날 밤, 수미는 주막 마당에 앉아있었다. 달은 구름에 숨었다 나타났다 했고, 그런 달을 보며 수미는 할머니의 말을 곱씹었다.
"혼자 앉아서 뭘 그리 생각해요?"
어느새 나그네가 다가와 앉았다.
"아, 깜짝이야. 근데 어떻게 여기 계세요?"
"나도 이 주막에서 쉬어가는 길이에요."
"아... 그쵸? 세상이 참 좁네요."
"세상이 좁은 게 아니라, 당신이 걷는 길이 내가 걷는 길과 같아서겠죠."
수미는 피식 웃었다. 이 나그네는 늘 이렇게 철학적인 말만 했다.
"저기요... 실은 궁금한 게 있는데요."
"네?"
"혹시... 옛날에 철학과 나오셨어요?"
나그네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아니요. 전 그냥... 편의점 알바생이었어요."
"네? 편의점이요?"
"네. 밤샘 알바를 하다 보면 이것저것 생각이 많아지더라고요."
수미는 깜짝 놀랐다. 신비스러운 철학자인 줄 알았던 나그네의 정체가 전직 편의점 알바생이라니.
"그래서 지금은요? 무슨 일을..."
"지금은 그냥... 걷고 있어요. 편의점 야간 알바를 10년 하다 보니, 저도 한번 때려치고 싶더라고요."
달이 다시 구름에 가려졌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앉아있었다.
"참, 아까 할머니가 주신 거에요."
나그네가 꺼낸 것은 소주 한 병이었다.
"마실래요? 이런 날씨에는 술이 제격이죠."
"네... 근데 저 술 잘 못해요."
"괜찮아요. 저도 못해요. 편의점에서 매일 술 파는 걸 보다 보니, 차라리 안 마시는 게 낫겠더라고요."
두 사람은 웃으며 소주잔을 부딪쳤다. 구름 사이로 달이 다시 얼굴을 내밀었다.
# 5장: 술 익는 마을의 축제
"아이고, 아가씨. 잠깐만 이것 좀 들어주소!"
다음날 아침, 수미는 마을 축제 준비로 분주한 골목길에서 한 아주머니의 부름을 받았다.
"네? 아, 네!"
그렇게 시작된 수미의 마을 축제 준비 참여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아이고, 우리 서울 아가씨가 솜씨가 이리 좋을 줄이야!"
"에이, 별말씀을요. 그냥 회사에서 파워포인트만 만들다가..."
"파워가 뭐여?"
"아... 그게 아니구요. 제가 원래 이것저것 만드는 걸 좋아해서요."
수미는 축제용 현수막을 만드는데 열중했다. 글씨를 쓰던 중 문득 웃음이 났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실적 보고서를 만들던 손으로 이제는 축제 현수막을 그리고 있다니.
"아이고, 배고프제? 이거 한 개 먹어보소."
한 할머니가 들고 온 주먹밥을 받아든 수미는 깜짝 놀랐다.
"어머! 이거 맛있는데요?"
"그려? 내가 특별히 넣은 재료가 있거든..."
"뭔데요?"
"사랑이여, 사랑!"
할머니의 말에 주변 사람들이 모두 폭소를 터뜨렸다.
해가 저물어갈 무렵, 축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음식을 나누고, 술을 마시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어이구, 우리 서울 아가씨 얼굴이 벌써 빨개졌네!"
"아니에요, 저 원래 이런..."
수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또 다른 건배 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우리 마을에 살다가시오!"
취기가 오른 할아버지 한 분이 큰 소리로 외쳤다.
"맞어요, 여기 살아요. 우리가 며느리 삼을게!"
"아이고, 말씀만이라도 감사해요."
문득 주막 할머니가 건넨 말이 생각났다.
'인생이란 게 말이야, 때려치든 붙잡든... 다 그렇게 살아지는 거야.'
그때, 축제장 한편에서 나그네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멀리서 수미를 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수미는 손을 들어 인사를 했지만, 나그네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6장: 나그네의 마지막 이야기
축제가 끝나고 이틀이 지났을 때였다. 수미는 마을 뒷산에서 우연히 나그네를 다시 만났다.
"아, 역시 여기 계셨군요."
"그러게요.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나 봐요."
"에이, 또 그런 철학적인 말씀을..."
"하하, 아니에요. 진짜로 기다리고 있었어요. 이제 떠나야 해서요."
석양이 산등성이를 물들이고 있었다.
"저기... 제가 궁금한 게 있는데요."
"네?"
"왜 편의점 알바를 10년이나 하셨어요?"
나그네는 잠시 하늘을 보더니 입을 열었다.
"사실... 제가 소설가였거든요."
"네? 소설가요?"
"네. 데뷔작이 큰 성공을 거뒀는데... 그 다음이 안 나오더라고요. 글이 안 써지고... 그래서 생각했죠. 잠깐 다른 일을 하면서 영감을 얻어보자."
"그런데 10년이나..."
"네. 하루하루 미루다 보니 10년이 되었더라고요. 편의점에서 매일 밤 사람들을 보면서... 언젠가는 이 이야기로 소설을 쓰겠다고 생각만 했죠."
"그래서 지금은요?"
"지금은... 걷고 있잖아요. 당신처럼요."
둘은 잠시 말없이 석양을 바라보았다.
"아! 맞다!"
수미가 갑자기 가방을 뒤적이더니 작은 수첩을 꺼냈다.
"이거... 제가 회사 다닐 때 썼던 건데, 혹시 필요하실까 해서요."
나그네는 수첩을 받아들었다.
"고마워요. 근데 이게 뭐예요?"
"매일 아침 지하철에서 보던 사람들 이야기예요. 심심해서 적어놓은 거죠. 뭐... 별거 아니지만..."
나그네는 수첩을 펼쳐보더니 미소를 지었다.
"이거... 재미있네요. '오늘도 그 아저씨는 넥타이를 반대로 매고 출근했다.' ... '저 학생은 분명 짝사랑 중이다. 매일 같은 역에서 누군가를 기다린다.'"
"아, 부끄러워라..."
"아니에요. 이런 게 바로 이야기죠. 당신도 작가의 소질이 있네요."
# 7장: 달빛 속에서의 작별
"이제 정말 가시는 거예요?"
달빛이 드리운 마을 어귀에서 수미는 나그네를 배웅하고 있었다. 선선한 밤바람이 두 사람 사이로 불어왔다.
"네. 이제 글을 써봐야죠. 당신 덕분에 용기가 생겼으니까요."
"제가 뭘요... 그냥 쓸데없는 낙서들인데..."
"아니요. 당신은 모르겠지만, 그 수첩에는 삶이 담겨있어요. 진짜 이야기가."
수미는 문득 웃음이 나왔다.
"있잖아요... 처음엔 선생님이 무슨 철학자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편의점 알바생이었다가, 이제는 소설가셨네요?"
"그러게요. 인생이란 게 참... 알 수 없죠?"
"맞아요. 저도 몇 주 전만 해도 제가 여기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
나그네는 배낭을 멜 준비를 하며 말했다.
"그런데 말이에요... 저 편의점 알바할 때 진짜 힘들었던 거 알아요?"
"뭔데요?"
"라면 끓이는 거요. 손님들이 꼭 바쁠 때 라면을 주문하시는데, 그게 어떤 날은 철학적으로 느껴지더라고요. 인생도 라면 같아서..."
"어머, 또 시작이네요?"
둘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자, 이제 가봐야겠네요."
"네... 근데 어디로 가시는 거예요?"
"글쎄요... 아마도 이야기가 있는 곳이겠죠?"
"흠... 역시 답이 되게 철학적이네요."
나그네는 달빛 아래서 마지막으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수미 씨, 혹시 제 소설 나오면 읽어주실 거예요?"
"당연하죠! 근데... 어떻게 찾아요?"
"음... 그냥 편의점에 가보세요. 문학 코너에."
"네? 잠깐만요... 설마 선생님 이름이..."
하지만 나그네는 이미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 8장: 새로운 아침, 남도의 빛
이튿날 아침, 수미는 주막 할머니와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할머니, 정말 감사했어요."
"아이고, 뭐가 감사해. 그나저나 이제 어쩔 건데?"
"음... 서울로 돌아가긴 할 건데요, 좀 다르게 살아보려구요."
할머니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다르게? 어떻게?"
"글을 써보려구요. 제가 본 사람들 이야기를..."
"아이고, 우리 아가씨가 작가가 되려나보네?"
"아니요, 그건 아니구요... 그냥 제가 보고 느낀 걸 적어보려구요. 회사 다닐 때처럼 숫자만 쓰는 게 아니라..."
할머니는 빙그레 웃으며 김치 한 통을 내밀었다.
"여기, 가져가서 먹어. 이게 내 첫사랑 이야기가 담긴 김치여."
"어머, 정말요?"
"아이고, 농담이제... 그냥 맛있는 김치여."
수미는 배낭을 메고 마을을 나서면서 문득 편의점이 생각났다.
'나중에 서울 가면 편의점마다 들러봐야겠다. 혹시 그분 책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아침 햇살이 따뜻하게 비추는 길을 걸으며 수미는 생각했다.
'이제 진짜 웃고 싶어서 웃는 날이 온 것 같아.'
주머니에서 꺼낸 휴대폰을 보니 여러 개의 부재중 전화가 있었다. 잠시 망설이다가 전원을 켰다.
"여보세요, 저예요... 네, 잘 지냈어요... 네, 이제 돌아갈 거예요... 근데 과장님, 혹시 사직서 아직 안 올리셨죠? ...네, 제가 다시 한번 생각해보고 싶어서요... 아니요, 이번엔 진짜 웃으면서 일해보려구요..."
전화를 끊고 수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이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새 소리가 마치 웃음소리처럼 들렸다.
'이제 나도... 나만의 이야기를 써볼까?'
남도의 아침 햇살은 여전히 따뜻했고, 수미의 발걸음은 이제 조금 더 가벼워져 있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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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sosohantry.tistory.com/entry/Poem-박목월-나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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