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기도>
1.가을의 첫 기도
퇴근길 공원의 가로등이 하나 둘 켜지기 시작했다. 정현은 낙엽이 쌓인 벤치에 앉아 깊어가는 저녁을 바라보았다. 며칠 전부터 불어오는 가을바람이 그의 뺨을 스쳤다. 코끝에 스치는 바람은 아직 차갑지 않았지만, 여름의 끝자락이 서서히 멀어져 가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정현의 입술 사이로 작은 속삭임이 새어 나왔다. 그것은 기도라기보다는 다짐에 가까웠다. 유리와 헤어진 지 육 개월, 계절이 한 바퀴를 돌아 다시 그때의 계절로 돌아왔다. 봄부터 여름까지는 그저 시간이 흘러가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이제 가을이 오고, 그녀와의 추억이 가득했던 이 계절을 마주하자 가슴 한켠이 무거워졌다.
벤치 옆으로 노란 은행잎 하나가 떨어졌다. 정현은 그 잎을 주워들었다. 작년 이맘때, 유리는 이 공원에서 은행잎을 주워 책갈피로 만들곤 했다. 그녀의 손끝에서 마른 잎은 언제나 새로운 의미를 가졌다. 하지만 지금 정현의 손 안에서 그것은 그저 마른 잎일 뿐이었다.
멀리서 까마귀 한 마리가 날아올랐다. 검은 날개가 붉은 노을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정현은 다시 한 번 작은 기도를 되뇌었다. 이번에는 좀 더 간절했다. 가을이 깊어갈수록 그의 마음도 깊어질 것이다. 그것을 알기에, 그는 지금 이 자리에서 자신과의 약속을 만들고 있었다.
서늘한 저녁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정현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으로 가는 길, 가로수 아래로 늘어선 그림자들이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 그림자들 사이로 걸으며 정현은 문득 유리의 향기를 떠올렸다. 계절이 바뀌어도 변함없이 그녀가 좋아하던 라벤더 향이었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그 향기가 날아올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정현은 주머니 속의 은행잎을 꺼내 바람에 날려보냈다. 노란 잎은 가로등 불빛 아래서 잠시 춤을 추다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것은 마치 작은 이별의 의식 같았다. 첫 번째 기도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2.그리움의 산책
점심시간, 정현은 회사 근처의 골목을 걷고 있었다. 커피 향이 골목 사이로 새어 나왔다. 무심코 고개를 돌린 그때, 익숙한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카페 오토네'. 유리와 자주 찾던 그 카페였다. 발걸음이 저절로 멈춰섰다.
창가에 비치는 따스한 햇살은 1년 전과 다름없었다. 그때도 이런 가을날이었다. 유리는 항상 창가 자리에 앉아 책을 읽었고, 정현은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행복을 느꼈다. 차가운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입술을 적시던 그녀의 모습이 아직도 선명했다.
"혼자 오셨나요?"
카페에 들어서자 직원이 물었다. 정현은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의 그 자리, 창가에 앉았다. 햇살이 따스하게 쏟아져 들어왔다. 테이블 위로 드리운 그림자가 시간의 흐름을 가리켰다.
"아메리카노 한 잔이요."
주문을 하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거리의 나무들은 노란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유리는 이맘때면 항상 단풍의 색깔을 구분하곤 했다. 붉은 단풍은 정열적인 사랑, 노란 단풍은 그리움, 갈색 단풍은 추억이라고. 지금 거리의 나무들은 온통 그리움의 색이었다.
커피가 나왔다.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예전에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만 마셨는데, 이제는 차가운 음료가 낯설게 느껴졌다. 사람의 취향도 이렇게 변하는 걸까. 아니면 단지 계절을 핑계 삼는 걸까.
"여기 혼자 오시는 분은 처음 보네요."
커피를 내어주던 직원이 말을 걸었다.
"아... 네."
"전에는 예쁜 여자분과 자주 오셨잖아요. 항상 책 읽으시던..."
정현의 마음이 살짝 흔들렸다. 낯선 이의 입에서 들려오는 그녀의 이야기는 예상치 못한 충격이었다. 직원은 미안한 듯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피했다. 창밖으로 마른 낙엽이 휘날렸다. 정현은 뜨거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쓴맛이 혀끝을 강하게 자극했다.
주머니 속 휴대폰이 울렸다. 점심시간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정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페를 나서며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햇살 속에 아무도 없는 창가 자리가 그렇게 쓸쓸해 보일 줄은 몰랐다. 골목을 빠져나오는 길에도 커피 향이 그를 따라왔다. 그것은 마치 지우고 싶어도 지워지지 않는 기억처럼 끈질겼다.
3.추억의 무게
도시 외곽의 억새밭은 늦은 오후의 햇살을 받아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정현은 억새가 흔들리는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작년 이맘때, 유리와 마지막으로 만났던 곳이었다. 그날의 기억은 여전히 선명했다. 차가웠던 그녀의 목소리, 마지막 인사도 없이 돌아선 뒷모습, 그리고 홀로 남겨진 자신의 무거운 발걸음까지.
"우리, 여기서 끝내자."
그날 유리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정현은 그 말을 떠올렸다. 이유를 묻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서로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컸던 것일까. 아니면 그저 시간이 흘러 사랑이 식어버린 것일까.
억새꽃 하나가 바람에 날려 정현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그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집어들었다. 하얀 억새꽃은 마치 눈처럼 보였다. 유리는 첫눈이 내리면 꼭 자신에게 연락하겠다고 약속했었다. 하지만 작년 겨울, 첫눈이 내리던 날 그녀에게서 온 것은 짧은 이별 문자뿐이었다.
"결국 우리는 서로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못했네."
정현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억새밭 사이로 난 좁은 길을 걸으며, 그는 유리와 함께했던 시간들을 하나씩 떠올렸다. 처음 만났을 때의 설렘, 서로의 꿈을 이야기하며 밤새 나눈 대화들, 작은 다툼 후의 어색한 화해까지. 모든 순간이 소중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추억이 오히려 무거운 짐이 되어 그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멀리서 까마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햇살이 기울어지며 억새밭에 긴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정현은 발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작년과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같은 바람이 불고, 같은 억새가 흔들렸다. 달라진 것은 오직 그의 마음뿐이었다.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보았다. 유리의 번호는 아직도 단축키에 저장되어 있었다. 손가락이 잠시 그 위에서 맴돌았다. 하지만 결국 전화를 걸지 않았다. 대신 그는 카메라를 켜고 눈앞의 억새밭을 담았다. 사진 속 억새들은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고요했다.
"이제는 정말 보내줘야 할 때인가 봐."
정현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해가 저물어가는 하늘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 아래로 펼쳐진 억새밭은 마치 거대한 물결처럼 일렁였다. 추억은 여전히 무거웠지만, 그 무게를 견디며 걸어가는 법을 조금씩 배워가고 있었다. 가을바람이 다시 한 번 그의 어깨를 스쳐갔다.
4.사랑을 위한 기도
늦은 오후의 억새밭은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정현은 해가 기울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걸음을 멈췄다. 따스한 빛줄기가 억새 사이로 스며들어 그의 얼굴을 비추었다. 문득 입술 사이로 작은 기도가 흘러나왔다.
"가을에는 사랑할 수 있게 하소서."
자신의 목소리가 낯설게 들렸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꺼내는 것이 어색했다. 유리와 헤어진 후로 그는 이 단어를 피해 다녔다. 마치 독약처럼, 혹은 날카로운 칼날처럼 그를 아프게 할까 두려워서였다.
억새가 바람에 흔들리며 희미한 속삭임 같은 소리를 냈다. 정현은 주머니에서 유리가 보냈던 마지막 편지를 꺼냈다. 종이는 이미 구겨지고 바래져 있었지만, 그는 아직도 이 편지를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정현 씨는 참 따뜻한 사람이에요. 하지만 그 따뜻함이 때로는 저를 숨 막히게 해요.'
편지의 마지막 문장이었다. 처음 이 문장을 읽었을 때는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사랑이란 서로를 따뜻하게 감싸주는 것이라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조금 알 것도 같았다. 너무 강하게 붙잡으려 했던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사랑이란 게 뭘까..."
정현은 하늘을 향해 중얼거렸다. 유리를 만나기 전의 사랑, 그녀와 함께했던 시간 속의 사랑, 그리고 지금 홀로 남아 되새기는 사랑. 같은 단어인데도 매 순간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멀리서 연인으로 보이는 두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의 손을 잡고 무언가를 이야기하며 웃고 있었다. 정현은 그들을 바라보며 문득 미소 지었다. 예전에는 다른 연인들을 보는 것이 괴로웠는데, 지금은 그저 그들의 행복이 조용히 축복처럼 느껴졌다.
해가 조금 더 기울었다. 황금빛은 점점 더 짙어져 붉은빛으로 변해갔다. 정현은 유리의 편지를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그것을 반으로 접었다. 이번에는 찢거나 버리지 않았다. 그저 다시 주머니 속에 넣었을 뿐이다.
"사랑은 잡는 게 아니라 놓아주는 거였구나."
깨달음이 조용히 그의 마음에 스며들었다. 사랑이 무엇인지 완전히 이해했다고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이제는 조금씩 배워가고 있는 중이었다. 사랑하는 법을, 그리고 놓아주는 법을.
까마귀 한 마리가 붉은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갔다. 정현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다시 한 번 작은 기도를 되뇌었다. 이번에는 좀 더 담담했다. 사랑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그것은 이제 간절함이 아닌 받아들임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5.네가 걸어간 길
퇴근 후 집에 돌아온 정현은 무심코 SNS를 열었다. 스크롤을 내리던 중, 그의 손가락이 멈췄다.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유리의 게시물이었다. 가을 하늘 아래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그녀의 모습. 낯선 카페의 창가에서 책을 읽고 있는 모습. 그리고 그 아래에는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새로운 계절, 새로운 시작'
정현은 한동안 화면을 바라보았다. 유리의 미소는 예전과 다름없이 따뜻했다. 하지만 무언가가 달랐다. 그녀의 눈빛에서 전에는 보지 못했던 편안함이 느껴졌다. 마치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것을 드디어 발견한 사람처럼.
"잘 지내고 있구나."
작은 중얼거림과 함께 정현의 가슴 한켠이 아려왔다. 그동안 알지 못했던 감정들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그리움, 후회, 아쉬움...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이상한 안도감까지. 유리가 행복해 보인다는 사실이 그를 슬프게 하면서도 동시에 기쁘게 했다.
베란다로 나가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가을밤의 공기가 차가웠다. 멀리 도시의 불빛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문득 유리와 함께 바라보았던 마지막 밤하늘이 떠올랐다. 그때는 이 불빛들이 우리의 미래처럼 반짝인다고 생각했는데.
휴대폰이 다시 손에 들려있었다. 유리의 게시물을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그녀가 앉아있는 카페의 창가에는 단풍잎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정현은 그제야 알아차렸다. 그녀는 이제 자신만의 가을을 살고 있었다. 더 이상 그들의 가을이 아닌, 온전히 그녀만의 계절을.
"나도 이제..."
말을 멈추고 정현은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베란다 난간에 기대어 서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사이로 달이 희미하게 비치고 있었다. 유리가 걸어간 길은 이제 그녀만의 것이 되었다. 그리고 정현 앞에는 그가 걸어가야 할 새로운 길이 놓여 있었다.
까마귀 울음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이제는 그 소리가 그렇게 쓸쓸하게 들리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묘한 위로가 되는 것 같았다. 마치 누군가가 그의 마음을 알아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방으로 돌아와 정현은 조용히 컴퓨터를 켰다. 스크린 속 달력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가을도 중반을 향해 가고 있었다.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흘러가고, 사람들은 저마다의 길을 걸어간다. 정현도 이제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창밖으로 늦은 밤의 바람이 불어왔다. 커튼이 살짝 흔들렸다. 정현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유리의 게시물을 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좋아요' 버튼을 눌렀다. 작은 하트가 반짝였다가 사라졌다. 그것은 마치 조용한 작별인사 같았다.
6.고독과 홀로서기
저녁 공원의 공기는 한층 차가워져 있었다. 정현은 익숙한 벤치에 앉아 어둠이 내려앉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까마귀 몇 마리가 나뭇가지 위에 앉아 있었다. 그들의 울음소리가 간간이 공원을 채웠다.
"가을에는 홀로설 수 있게 하소서."
입술 사이로 새어나온 기도는 이제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처음 이 기도를 했을 때와는 다른 단단함이 그의 목소리에 실려 있었다. 유리의 SNS를 본 이후, 정현은 조금씩 변화하고 있었다. 고독이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그 고독을 천천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로 낙엽이 흩날렸다. 정현은 무심코 손을 뻗어 그중 하나를 잡았다. 낙엽은 바스락거리며 그의 손바닥 위에서 부서졌다. 예전에는 이런 순간에도 유리를 떠올렸을 텐데. 지금은 그저 가을이라는 계절 그 자체를 느끼고 있었다.
"혼자라는 건..."
말을 멈추고 정현은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혼자라는 것. 그것은 외로움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었다. 때로는 자유였고, 때로는 성장이었다. 유리와 함께였던 시간도 소중했지만, 지금 이 순간 역시 그만큼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까마귀들이 무리 지어 날아올랐다. 검은 날개가 저녁 하늘을 수놓았다. 정현은 문득 미소 지었다. 예전에는 까마귀를 보면 왠지 모를 쓸쓸함이 밀려왔는데, 이제는 그들의 당당한 비행이 오히려 부러워졌다. 홀로 서는 법을 아는 그들처럼, 자신도 조금씩 그렇게 되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주머니 속 휴대폰이 울렸다. 회사 동료가 보낸 메시지였다. 퇴근 후 술 한잔 하자는 제안이었다. 예전의 정현이라면 아마 거절했을 것이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핑계를 대며.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좋습니다. 어디서 만날까요?"
답장을 보내고 정현은 벤치에서 일어났다. 가을바람이 그의 뺨을 스쳤다. 차가웠지만 상쾌했다. 그는 천천히 공원을 가로질러 걸었다. 발아래로 밟히는 낙엽들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려왔다.
공원을 나서며 정현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뒤를 돌아보았다. 까마귀들이 날아간 하늘은 이제 진한 남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별들이 하나 둘 깨어나기 시작했다. 그는 다시 한 번 작은 기도를 되뇌었다. 이번에는 기도라기보다 다짐에 가까웠다.
"이제는 정말 혼자서도 괜찮아."
걸음을 옮기며 정현은 처음으로 진정한 의미의 홀로서기를 느꼈다. 그것은 쓸쓸함과는 다른 것이었다. 마치 오랜 겨울을 지나 마주한 봄의 첫 햇살 같은, 그런 따스한 독립이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로 그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이제 그 그림자는 더 이상 외롭지 않았다.
7.이별의 정리
퇴근 후 집으로 돌아온 정현은 오랫동안 열지 않았던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는 유리와의 추억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폴라로이드 사진들, 손글씨로 가득한 편지들, 그리고 그녀가 좋아하던 라벤더 향이 희미하게 배어 있는 책갈피까지. 시간이 멈춘 것처럼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이제는 정리할 시간이구나."
정현은 천천히 사진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첫 번째 사진은 그들의 첫 데이트 날 찍은 것이었다. 유리는 카메라를 향해 수줍게 미소 짓고 있었고, 정현은 어색하게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있었다. 그때는 이 어색한 순간이 언젠가 이렇게 소중한 기억이 될 줄 몰랐다.
창밖으로 늦은 가을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빗방울 소리를 들으며 정현은 한 장 한 장 사진을 넘겼다. 공원에서, 카페에서, 바닷가에서... 각각의 사진은 그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마지막 사진에는 억새밭의 일몰이 담겨 있었다. 사진 속 하늘은 붉게 물들어 있었고, 그것은 그들의 마지막 순간을 예견하는 것 같았다.
편지들도 하나씩 펼쳐보았다. 유리의 반듯한 글씨체가 눈에 들어왔다. 처음의 편지들은 설렘과 기대로 가득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톤은 조금씩 변해갔다. 마지막 편지에 이르러서는 그녀의 글씨체마저 흔들리는 것 같았다.
"네가 힘들어했던 걸 왜 그때는 몰랐을까."
정현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창밖의 빗소리가 조금 더 거세졌다. 방 안에는 옅은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했지만, 그는 불을 켜지 않았다. 이 어둠 속에서 과거와 마주하는 것이 오히려 편했다.
서랍 맨 아래에는 작은 상자가 있었다. 그 안에는 유리가 좋아하던 라벤더 향수가 담긴 유리병이 있었다. 뚜껑을 살짝 열자 희미한 향기가 퍼져나왔다. 정현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 향기 속에서 유리의 미소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이제는 괜찮아."
정현은 천천히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빗방울이 유리창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누군가의 눈물 같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의 눈가가 젖지 않았다. 대신 가슴 한켠에서 묘한 평화로움이 느껴졌다.
정현은 다시 책상으로 돌아와 편지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하나하나 읽지 않았다. 대신 조심스럽게 접어 새 봉투에 넣었다. 사진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더 이상 과거에 머물지 않기로 했다. 이것은 버림이 아닌, 소중한 추억으로서의 정리였다.
까마귀 한 마리가 창가에 잠시 내려앉았다가 날아갔다. 정현은 그 모습을 보며 작은 미소를 지었다. 이제 그에게도 날개가 생긴 것 같았다. 과거라는 무게를 내려놓을 준비가 된 것이다.
빗소리가 점차 잦아들었다. 정현은 정리된 편지와 사진이 담긴 상자를 조용히 닫았다. 이제 이것은 더 이상 아픔의 증거가 아닌, 그가 겪어온 성장의 기록이 될 것이다. 창밖으로 흐린 달빛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새로운 밤이 시작되고 있었다.
8.가을의 끝자락
아침 출근길, 정현은 평소보다 일찍 집을 나섰다. 어제까지 내리던 비가 그치고 맑은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거리의 나무들은 대부분의 잎을 떨구고, 앙상한 가지만 남아 있었다. 그 모습이 어쩐지 홀가분해 보였다.
"이제 정말 가을이 끝나가는구나."
발걸음을 옮기며 정현은 중얼거렸다. 어제 정리했던 추억들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번에는 가슴이 아프지 않았다. 오히려 그 시간들을 보내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함이 느껴졌다.
공원을 가로지르는 길에 들어섰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울긋불긋했던 나뭇잎들은 이제 대부분 땅으로 떨어져 있었다. 아침 햇살이 앙상한 가지 사이로 비치며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정현은 그 그림자를 따라 걸었다.
"안녕하세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유리였다. 그녀도 이 길을 자주 이용했었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정현은 잠시 놀랐지만, 이내 차분히 미소 지었다.
"안녕하세요."
둘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유리의 목에는 새로운 스카프가 감겨 있었다. 라벤더 색이 아닌, 연한 베이지 색이었다. 그녀도 변화하고 있었다.
"잘 지내시죠?"
유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네, 덕분에요. 유리 씨도 잘 지내시는 것 같네요."
"네... 아, 그러고 보니 첫눈이 온대요. 오늘..."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작년의 약속이 떠올랐기 때문일까. 하지만 이제 그것은 그저 지나간 약속일 뿐이었다.
"첫눈이 오면 좋겠네요."
정현이 담담하게 말했다.
"네, 그러게요."
유리가 살짝 웃었다. 그녀의 미소는 여전히 따뜻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정현의 마음을 흔들지 않았다. 대신 조용한 축복처럼 느껴졌다.
"그럼, 안녕히 가세요."
"네, 안녕히 가세요."
각자의 길로 발걸음을 옮기며, 정현은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이었다. 첫눈은 아마도 저녁이 되어야 내릴 것이다. 그때는 그도, 유리도 각자의 자리에서 그 순간을 맞이할 것이다.
까마귀 몇 마리가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갔다. 정현은 그들의 날갯짓을 바라보며 걸음을 이어갔다. 이제 그의 발걸음은 더 이상 무겁지 않았다. 가을은 끝나가고 있었지만, 그것은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을 의미했다.
에필로그: 새로운 겨울을 기다리며
저녁, 예보대로 첫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정현은 회사 앞 작은 공원의 벤치에 앉아 있었다. 하얀 눈송이들이 천천히 땅으로 내려앉았다. 가로등 불빛 아래로 눈송이들이 반짝였다.
"가을은 가고 겨울이 오는구나."
정현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손바닥을 펼쳐 눈송이를 받아보았다.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그는 문득 지난 봄부터 시작된 자신의 여정을 떠올렸다. 유리와의 이별, 끝없이 이어진 그리움, 그리고 마침내 찾아온 홀로서기까지.
주머니 속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동료들이 보낸 메시지였다. 회식 자리에 초대하는 내용이었다. 정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답장을 보냈다.
"갈게요. 30분 후에 도착할 것 같습니다."
벤치에서 일어나며 정현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송이들이 여전히 소리 없이 내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작은 축복 같았다.
"이제 진짜 괜찮아."
정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눈이 쌓이기 시작한 길을 걸으며, 처음으로 진정한 의미의 새로운 시작을 느꼈다. 더 이상 과거에 묶여있지 않은, 온전히 자신의 것인 시작을.
발자국 소리가 눈 위에서 부드럽게 울렸다. 정현은 이제 자신만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그것은 더 이상 쓸쓸한 길이 아니었다. 차가운 겨울 공기가 그의 뺨을 스쳤지만, 그의 마음은 따뜻했다.
까마귀 한 마리가 멀리서 울었다. 이제 그 소리는 더 이상 고독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것은 자유였고, 새로운 시작이었다. 정현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앞으로의 길이 어떨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이 두렵지는 않았다.
첫눈은 계속해서 내렸다. 정현의 어깨 위로, 머리 위로 하얀 눈송이들이 쌓여갔다. 그것은 마치 새로운 계절이 그에게 건네는 작은 선물 같았다. 정현은 이제 진정으로 자신의 겨울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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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sosohantry.tistory.com/entry/Poem-김현승-가을의-기도
'글쓰기 (Writing) > 짧은 이야기 (Short story with AI)'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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