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ort story)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1. 일상 속의 무기력함
윤서는 아침부터 머리를 짓누르는 피로감을 떨치기 위해 커피잔을 꽉 쥐었다. 회사로 향하는 지하철은 늘 그렇듯 출근 인파로 가득했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무표정한 얼굴로 스마트폰 화면을 응시하거나 창밖의 빠르게 지나가는 어둠을 바라보고 있었다. 윤서도 그들 중 한 사람이었다.

기계처럼 이어지는 날들이었다. 알람 소리에 일어나고, 직장에 가서 일하고, 피로에 절어 퇴근해 침대에 쓰러진다. 삶은 정해진 대본을 따라 움직이는 무대 같았다.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걸까?'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창밖의 흐릿한 도시 풍경이 그의 시야를 스쳤다. 윤서는 곧 시선을 돌렸다. 그 생각은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쏟아지는 업무와 상사의 재촉은 그런 사색을 허락하지 않았다.

어느 날 밤이었다. 야근을 마치고 휘청거리며 지하철에 몸을 실은 윤서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지하철 안은 텅 비어있었고, 희미한 형광등 아래로 그림자들이 춤을 췄다. 그는 눈을 감고 짧은 휴식을 시도했다. 그런데 갑자기 고요한 공간을 깨뜨리며 바이올린 소리가 울려 퍼졌다.

윤서는 깜짝 놀라 눈을 떴다. 지하철 끝쪽에 한 연주자가 서 있었다. 중절모를 쓰고 낡은 외투를 입은 그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었다. 그의 연주는 단순히 아름다운 소리를 넘어선 무언가가 있었다. 음표 하나하나가 윤서의 가슴을 두드렸다. 익숙하면서도 먼 기억을 깨우는 듯한 음악이었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자 도시의 불빛이 그를 환영하듯 반짝였고, 그 위로 둥근 달이 흐릿하게 떠 있었다. 갑작스럽게 윤서의 머릿속에 오래전 기억이 떠올랐다. 혜리와 함께 걷던 그 여름밤, 공원의 잔디밭 위에 누워 달을 보며 이야기하던 순간들. "언젠가 우리, 저 달을 보며 음악을 듣던 날 기억할까?" 혜리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귀에 맴돌았다.

그 순간, 바이올린의 울림은 더 강하게 그의 심장을 조였다. 오래 묻어두었던 감정들이 천천히 깨어났다. 윤서는 자신이 왜, 언제부터 꿈을 잃어버렸는지 곱씹으며 창밖의 달을 보았다. '나는 왜 이 모든 걸 잊고 살았을까?'

연주는 끝났지만, 음표의 여운은 지하철에 고요하게 남아 윤서의 마음을 울렸다.
 
 
 
2. 달빛과 음악의 만남
지하철은 한적한 역에 멈춰 섰지만, 윤서는 내리지 않았다. 몇몇 승객이 타고 내렸지만 그의 시선은 여전히 바이올린을 연주하던 연주자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는 무대가 사라진 듯 연주를 멈추고, 고개를 숙인 채 한 손으로 바이올린을 고쳐 잡고 있었다. 그 모습은 윤서에게 어딘가 익숙하고, 동시에 낯설었다. 오랫동안 무감각하게 지내왔던 그의 일상이 서서히 깨지기 시작했다.

바이올린 연주자가 윤서의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마주쳤다. 깊고 고요한 눈빛이었지만, 그 안에는 무언가 말하고 싶은 이야기가 담겨 있는 듯했다. 윤서는 순간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낯선 시선이 자신을 꿰뚫어 보는 느낌이었다. 그가 연주를 재개하자 지하철은 다시 어두운 터널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음악은 이번에는 조금 다르게 들려왔다. 마치 오래된 이야기를 품은 음표들이 윤서의 귀를 간질이며 그의 마음을 탐색하는 듯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눈앞에는 어린 시절의 장면이 생생히 떠올랐다.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축제 전날, 혜리와 함께 무대 뒤에서 떨리는 마음으로 대기하던 순간이었다. 혜리는 피아노 앞에 앉아 그를 격려하며 말했다. "윤서야, 너의 연주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거야. 그걸 믿어."

그 시절의 윤서는 작은 손으로 바이올린을 쥐고 긴장 속에서도 무대를 향해 걸어갔다. 그가 연주를 시작했을 때 운동장에 모인 아이들의 수다스러운 소리도, 선생님들의 잔소리도 모두 잦아들었다. 혜리의 눈빛이 그에게 보내는 격려의 메시지처럼 다가왔고, 그는 자신을 잊고 연주에 몰입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꿈은 언제부터인가 사라졌다. 그 시절의 열정은 무거운 책임과 현실 앞에서 서서히 흐려져 갔다.

윤서는 지하철이 갑자기 속력을 줄이며 다음 역에 도착하자 깨어났다. 음악이 멈춘 자리에는 연주의 여운이 깊게 남아 있었다. 그제야 연주자가 천천히 말을 걸었다. “음악이 마음을 기억하게 하는 힘이 있다는 걸 믿으세요?” 그의 목소리는 낮고, 울림이 있었다.

윤서는 고개를 들며 약간 멍한 상태로 답했다. “글쎄요... 오랜만에 생각이 나긴 했어요.” 그는 스스로도 놀랄 만큼 진솔한 대답을 내뱉었다. 연주자는 가만히 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그럼, 그걸 잃어버리지 마세요. 달빛은 늘 같은 자리에 있지만, 우리가 바라보지 않으면 아무것도 느낄 수 없죠.”

그 말은 윤서의 마음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제야 그는 깨달았다. 자신이 그토록 무기력하게 살았던 이유는 스스로 달빛을 외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하철은 다시 출발했지만, 이번에는 윤서의 눈 속에 희미한 반짝임이 떠올랐다.
 
 
 
3. 어린 시절의 회상: 혜리와의 꿈
윤서는 집으로 돌아왔지만 그날 밤,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지하철에서 들었던 음악과 연주자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천장을 바라보며 어둠 속에서 숨죽인 채 옛 기억을 더듬었다. 눈을 감자마자 혜리와 함께했던 여름밤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초등학교 6학년, 그 시절 윤서와 혜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친구였다. 윤서가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동안 혜리는 피아노를 연주했다. 둘은 종종 학교가 끝나면 공원에서 만나 음악을 연습하거나 잔디밭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곤 했다. 그때의 밤하늘은 언제나 까맣게 빛났고, 별들은 두 사람에게 다가갈 듯이 반짝였다.

“윤서야, 네가 바이올린을 연주하면 달이 웃는 것 같아.” 혜리는 손가락으로 하늘의 달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윤서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웃다니, 말도 안 돼.” 하지만 혜리는 진지한 눈빛으로 윤서를 바라보며 속삭였다. “정말이야. 네 음악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그 순간 윤서는 자신이 무엇을 위해 음악을 연주하는지를 알 것 같았다. 그는 혜리와의 시간을 소중히 여겼고, 그때의 음악은 그저 기술이 아닌 서로의 마음을 이어주는 다리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학업과 현실이 그들의 시간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음악은 취미가 아니라 성과가 되어야 했고, 그 성과가 윤서의 인생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며 윤서는 음악을 포기했다. 혜리와도 점점 멀어졌다. 대학 입시와 미래의 불안감은 그들 사이의 대화를 메마르게 만들었고, 결국 각자의 길로 흩어졌다. 윤서는 그 이후 음악을 들을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저릿했다. 하지만 그 감정은 서서히 무뎌졌고, 점차 그는 음악에 대한 기억마저 잊어갔다.

오늘 밤, 지하철에서 들었던 바이올린 소리는 그의 오래된 상처를 건드리며 그리움과 후회의 파동을 일으켰다. 윤서는 갑작스러운 충동에 이끌려 책상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는 세월에 묻혀 빛바랜 사진 한 장이 있었다. 사진 속에는 어린 윤서와 혜리가 환하게 웃으며 나란히 서 있었다. 혜리의 손에는 피아노 악보가 들려 있었고, 윤서의 어깨에는 바이올린이 걸려 있었다.

윤서는 사진을 바라보며 손가락으로 혜리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리움이 목구멍에 걸려 말라붙은 듯했다. '왜 그때 우리는 그렇게 쉽게 헤어져야 했을까?' 그는 사진을 꼭 쥐며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대답할 수 없는 질문에 그저 눈을 감고 긴 숨을 내쉬었다.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고, 창문 너머로 보이는 달빛은 여전히 윤서의 방 안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달빛은 그때와 변함없이 그의 곁에 있었다. 그러나 달빛을 느낄 수 있을지, 바라볼 용기가 있는지는 윤서에게 달려 있었다.
 
 
 
4. 음악의 울림과 내면의 파장
윤서는 회사에 출근해도 머릿속은 여전히 지하철의 그 밤에 멈춰 있었다. 상사의 지시와 동료들의 대화가 마치 물속에서 들리는 것처럼 멍하게 들렸다. 한 번 떠오른 기억은 쉽게 잦아들지 않았고, 윤서의 머릿속에서 혜리의 웃음소리와 바이올린 선율이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점심시간이 되어 카페테리아로 내려간 윤서는 혼자 창가에 앉았다. 창밖으로 보이는 도로에는 차들이 쉼 없이 오갔고, 회색빛 건물들 사이로 흐릿한 하늘이 걸려 있었다. 그때 한 무리의 사람들이 지나가며 웃는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는 윤서의 귀에 음악처럼 들렸고, 다시금 그의 가슴속에 파장을 일으켰다.

그날 밤, 윤서는 퇴근 후 다시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늦은 시간이었지만, 그 연주자를 찾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그를 움직이게 했다. 지하철 플랫폼에 도착했을 때, 그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귀를 기울였다. 사람들은 드문드문 앉아 있었고, 플랫폼은 고요했다. 윤서는 어깨가 축 처지며 스스로를 비웃었다. '그럴 리가 없지, 우연은 그리 쉽게 반복되지 않아.'

그러나 열차가 도착하고, 문이 열리는 순간 그는 다시 들려오는 바이올린 소리에 귀를 멈췄다. 이번에도 선율은 고요하게 지하철 안을 감싸고 있었다. 그 연주자는 오늘도 같은 자리에 서서 눈을 감고 있었다. 윤서는 조심스레 다가가 그 앞에 섰다. 음악은 그의 마음을 꿰뚫듯 강하게 울렸고, 윤서는 한참을 바라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 음악은... 누구의 곡인가요?"

연주자는 연주를 멈추지 않고 대답했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곡이죠. 당신의 기억 속에도 하나쯤은 있을 겁니다.”

윤서는 가슴이 떨렸다. 연주자는 윤서의 표정을 보며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 곡이 잊혀졌다고 생각해도, 마음속에 여전히 흐르고 있다는 걸 느껴본 적이 있나요?"

윤서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혜리와의 기억, 잃어버린 꿈, 멈춰버린 시간들이 그의 내면에서 다시 소용돌이쳤다. 그 순간, 그는 다시 한 번 그때의 자신이 되어 있었다. 무대 위에서 떨리던 어린 윤서가, 혜리의 웃음소리와 함께하던 그때가 선명하게 다가왔다.

연주자는 잠시 후 연주를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 "음악은 과거를 잊지 않게 해주는 다리죠. 그러나 그 다리는 앞으로 걸어갈 길도 비춰줍니다."

윤서는 그 말을 듣고 차마 대답할 수 없었다. 연주자의 말은 그가 수없이 되뇌었던 의문에 답을 주는 것만 같았다. 과거를 잊는 것이 아니라, 그 기억을 붙잡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플랫폼에 지하철이 다시 들어오자, 윤서는 가슴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문이 열리고, 찬 공기가 그를 감쌌다. 이번에는 달빛이 그의 눈에 들어오며 윤서의 마음속 어딘가가 조금씩 풀려갔다.
 
 
 
5. 연주자와의 운명적 대화
윤서는 망설임 없이 지하철에 올랐다. 그날의 만남은 그의 내면을 흔들어 놓았고, 평소와 다르게 심장은 요동쳤다. 지하철 문이 닫히고, 열차가 다시 어둠 속 터널을 달리기 시작했을 때, 윤서는 방금 마주한 연주자의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음악은 과거를 잊지 않게 해주는 다리...’ 그의 말은 윤서의 가슴에 깊이 파고들었다.

열차는 곧 목적지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윤서는 창밖을 바라보며 스쳐가는 불빛들 사이로 반사되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지친 얼굴과 비어 있는 눈동자. 그곳에, 언젠가 혜리와 함께 꿈을 나누던 윤서의 모습은 없었다. 그의 시선은 창밖의 달빛에 멈췄다. 은은하게 빛나는 달이 그에게 조용히 속삭이는 듯했다. ‘너는 그때의 너를 잃지 않았어.’

“마지막 역입니다. 모두 내리시기 바랍니다.” 차가운 안내 방송이 울렸고, 윤서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발걸음을 떼려는 순간, 그 익숙한 바이올린 소리가 다시 귀에 들려왔다.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헷갈릴 만큼 순간이 스쳤다. 그는 소리를 따라 플랫폼 끝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거기에는 그 연주자가 서 있었다. 이번에는 윤서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윤서는 조심스레 다가가며 입을 열었다. “오늘의 연주는... 저에게 많은 걸 떠올리게 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떨렸다.

연주자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나 자신의 곡을 마음속에 품고 살아갑니다. 그 곡을 다시 연주할 수 있는지는 우리에게 달려 있죠.”

윤서는 그 말에 눈을 감고 깊은 숨을 내쉬었다. “저는... 한동안 제 곡을 잊고 살았어요. 현실의 무게에 눌려서요.”

연주자는 눈빛을 빛내며 천천히 말했다. “기억은 과거를 비추지만, 그것이 우리의 발걸음을 앞으로 내딛게 할 수도 있어요. 과거에 머무르는 대신 그 빛을 따라가세요.”

그 순간 윤서는 뭔가가 결심되는 듯했다. 그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과거에만 갇혀있던 자신을 돌아봤다. 이제는 그 기억을 무겁게 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때라는 걸 알았다.

지하철 역은 조용했고,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윤서는 주머니 속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그는 긴 메시지를 타이핑하기 시작했다. ‘혜리, 오랜만이야. 나 지금 너와 나누었던 그 음악을 떠올렸어. 혹시 우리...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메시지를 보낸 뒤 윤서는 숨죽이며 화면을 내려다봤다. 달빛이 창을 통해 플랫폼을 비추며 윤서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그 빛은 그에게 새로운 시작을 약속하듯, 한결 가벼운 마음을 선물했다.
 
 
 
6. 깨달음과 미래의 선택
윤서는 플랫폼에 서서 달빛을 한참 바라봤다. 보내진 메시지의 여운은 그의 손끝에서 심장까지 전해지며 묘한 설렘을 남겼다. 혜리가 답을 할지, 아니면 그 답을 기다리며 얼마나 시간이 흘러야 할지는 알 수 없었지만, 오랜만에 그는 마음속의 불안과 기대를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그날 밤, 윤서는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지만 쉽게 잠들 수 없었다. 방 안에는 희미한 달빛이 가득 찼고, 그는 눈을 감고 음악을 떠올렸다. 그동안 무거운 현실에 짓눌려 잊고 있던 음악이 다시 가슴 속에서 울려 퍼지는 듯했다. 어린 시절 혜리와 함께했던 무대, 둘만의 비밀스러운 연습, 그리고 별이 쏟아지던 공원의 밤. 그 기억들은 윤서에게 다시금 그 시절의 열정을 불러일으켰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렸을까?' 윤서는 생각했다. 일상에 지치고 반복되는 삶 속에서 그는 자신이 얼마나 변해버렸는지조차 깨닫지 못했다. 회사에서의 피곤한 시간들, 숨 막히는 회의와 끝없는 보고서가 그를 닫힌 세계에 가두어 두었다. 하지만 오늘, 그 작은 음악의 울림이 그의 마음을 열어주었다.

다음 날 아침, 윤서는 평소와 다르게 일어났다. 익숙했던 출근길이 오늘은 다르게 느껴졌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발걸음 속에서 그는 잠시 멈춰 섰다. 사람들이 빠르게 지나치는 틈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이 그의 머리카락을 스쳤다. '오늘은 다른 시작을 할 수 있어.' 윤서는 그렇게 생각했다.

회사에 도착해 일에 몰두하려던 찰나, 그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심장이 한 번 크게 뛰었다. 화면에는 '혜리'라는 이름이 뜨고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메시지를 열었다.

“윤서야, 나도 오랫동안 그 음악을 잊지 못했어. 만나서 이야기 나눌 수 있으면 좋겠어.”

윤서는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따뜻함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동안 잊고 살았던 자신의 한 조각이 되돌아온 기분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가며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햇빛이 창을 통해 쏟아지며 그의 얼굴을 비추었다. 그 빛은 마치 새벽의 달빛처럼 따뜻하고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것 같았다.

그는 이제 앞으로 나아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음악을 다시 손에 잡을 수 있을지, 혜리와의 재회가 어떤 의미를 가질지 알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오늘은 어제와 다를 것이 분명했다.
 
 
 
 
7. 혜리에게 보낸 메시지
윤서는 점심시간이 되자 회사 근처의 작은 공원으로 향했다. 도시의 소음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공원의 벤치에 앉아 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을 받으며 그는 다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혜리’라는 이름이 화면에 떠 있는 것을 확인하며 가슴속의 떨림을 느꼈다. 방금까지의 소란스러웠던 사무실의 소음은 사라지고, 마치 시간마저 천천히 흐르는 듯한 느낌이었다.

윤서는 혜리에게 메시지를 보냈던 그날 밤을 떠올렸다. 긴 시간 동안 연락이 끊겼던 친구에게 다시 손을 내미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지하철에서의 연주와 연주자의 말은 그에게 용기를 주었다. 그 메시지가 보내졌을 때 윤서는 한참 동안 휴대폰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고민했다. 그리고 이제 혜리의 대답은 기다림의 끝을 알리고 있었다.

혜리와의 만남은 다음 날 저녁으로 정해졌다. 두 사람은 오랜 추억이 서린, 예전 함께 자주 가던 작은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 카페는 바뀌지 않았다. 여전히 고풍스러운 나무 테이블과 벽을 채운 오래된 책들, 그리고 조용한 음악이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윤서는 문을 열고 들어가며 옛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그곳에서 혜리와 함께 나눈 웃음과 이야기들이 한순간에 되살아났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혜리가 들어섰다. 긴 세월이 흘렀지만 혜리의 눈빛은 여전히 윤서가 기억하던 그대로였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눈동자. 윤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맞이했다. 두 사람은 조심스레 인사를 나누고 마주 앉았다.

“오랜만이야, 윤서.” 혜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는 과거의 기억을 깨우는 열쇠와도 같았다. 윤서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정말 오랜만이야.”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지만, 두 사람은 금세 그동안 쌓인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윤서는 혜리에게 지하철에서의 일을 이야기하며 자신이 왜 그렇게 오랫동안 음악을 잊고 살았는지 고백했다. 혜리는 조용히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때로는 고개를 끄덕이고, 때로는 미소를 지었다.

“윤서야, 그때 넌 나에게 항상 특별한 존재였어. 너의 음악은 나에게 꿈과 같았고, 네가 연주할 때마다 그 꿈을 같이 꾸곤 했지.” 혜리의 말에 윤서는 목이 메었다.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시절의 자신이 그녀의 기억 속에서 여전히 살아있다는 사실이 그를 울컥하게 만들었다.

“나도 다시 음악을 찾고 싶어.” 윤서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단호했다. 혜리는 따뜻한 미소로 그를 응원했다. “그럼 우리 다시 그때처럼 꿈을 꿔보자.”

그날 밤, 카페를 나서는 두 사람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윤서는 하늘을 보았다. 밤하늘의 달이 그들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음악은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이제 다시 시작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8. 달빛 아래 시작되는 새로운 여정
혜리와의 만남 후, 윤서의 삶은 이전과는 달랐다. 아침을 맞이하는 방식부터가 달라졌다. 알람 소리에 억지로 몸을 일으키던 예전과 달리, 이제 그는 창문을 열고 부드럽게 불어오는 바람과 함께 아침을 맞이했다. 오래전 꿈꿨던 소년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한 것이다.

그날 이후 윤서는 틈틈이 바이올린을 꺼내어 연습하기 시작했다. 손가락은 굳고 어색했지만, 선율이 점차 살아나는 것을 느낄 때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희열이 솟아올랐다. 혜리와의 만남은 그에게 단순한 추억의 회상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보여준 전환점이었다.

몇 주 후, 혜리가 메시지를 보내왔다. “윤서야, 다음 주말에 작은 연주회가 열리는데 같이 가볼래?” 윤서는 가슴이 뛰었다. 오랜 시간 동안 청중이 아닌 무대 위의 연주자로 서 있던 자신을 상상해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혜리의 제안은 마치 그의 내면 깊은 곳에서 꿈틀대던 소리를 세상에 내보내라는 초대와 같았다.

연주회가 열리는 밤, 윤서는 자신의 낡은 바이올린 케이스를 손에 쥐고 지하철에 올랐다. 무언가에 이끌리듯 그가 연습하던 선율이 머릿속에서 흐르고 있었다. 지하철은 그의 마음과 함께 진동했고, 창밖의 달빛은 여전히 그와 동행하고 있었다. 도착한 연주회장은 작은 공원 한가운데 있었다. 몇 개의 조명이 나무 사이로 비추며 무대를 환히 밝혔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무대를 바라보았고, 밤하늘은 별빛과 달빛으로 가득했다.

윤서가 무대 옆에 섰을 때 혜리가 다가와 미소를 지었다. “떨리니?” 그녀의 질문에 윤서는 솔직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이 떨림이 좋아.”

무대에 올라선 윤서는 오랜 시간 묻어두었던 감정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깊은 숨을 들이마시고, 바이올린 활을 천천히 들었다. 그리고 첫 음을 긋는 순간, 지하철에서 들었던 그 연주의 울림이 그에게 다시 다가왔다. 윤서의 선율은 달빛 아래의 공원을 가득 채웠고, 사람들의 눈빛은 하나같이 빛났다.

혜리는 관객석에서 윤서를 바라보며 작은 손뼉을 쳤다. 두 사람의 눈빛이 마주치자, 마치 오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그날 밤 하늘을 함께 바라보던 순간으로 돌아간 듯했다.

연주가 끝났을 때, 윤서는 커다란 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관객의 박수 소리와 함께 그는 한 번 더 꿈꿀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 꿈은 이제 추억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 꿈은 지금, 여기서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달빛은 그들의 길을 환하게 비추고, 윤서의 마음 속에는 새로운 멜로디가 울리고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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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 아래 울리는 선율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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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 김소월,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