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 속의 나를 찾아서>
1장: 우물가에서 만난 그놈
산모퉁이를 돌자, 논가에 외딴 우물이 눈앞에 나타났다. 오늘따라 공장에서 들리는 단조로운 기계 소리가 유난히 더 거슬렸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동료들의 똑같은 농담에도 왜인지 답답함이 밀려왔다. ‘이러다 진짜 기계가 되겠구나’라는 생각이 스쳤다. 나조차 그 생각에 무의식적으로 놀랄 정도였다. 결국 나는 숨을 고르기 위해 공장을 나와 무작정 길을 걷기 시작했다. 어디로 가든, 걷다 보면 무언가 나아질 것 같았다. 그렇게 걷던 도중 우연히 발견한 것이 바로 이 오래된 우물이었다. 멈춰 선 나는 고요히 가라앉은 물 위로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우물을 들여다본 순간, 물속에 비친 내 얼굴이 어딘가 이상했다. 표정은 멍하니 고요했지만, 마치 지금과 전혀 다른 내가 저 아래에 있는 것 같았다. 헛웃음을 참지 못하며 등을 돌리려던 순간, 내 모습이 아니게 보였던 물속의 얼굴이 갑자기 실룩거리더니 입을 떼었다.
“뭐야... 이놈 뭐지?”
나는 당황해서 한 걸음 물러섰다. 이상했다. 요즘 들어 스트레스를 많이 받긴 했지만,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그런데도 자꾸만 우물로 시선이 갔다. 내가 잘못 본 걸까, 아니면 진짜 뭔가가 있다는 걸까. 기이한 생각이 들면서도, 나는 다시 우물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우물 속 사나이는 다시 눈을 마주치더니 이번엔 선명하게 입을 열었다.
“너, 대체 왜 그렇게 멍청하게 생겼냐?”
내 눈이 번쩍 떠졌다. 방금 뭐라고 했지? 우물 속의 내가 나한테 뭐라고 한 거야?
“뭐...? 너 지금 나한테 하는 소리냐?”
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중얼거렸지만, 우물 속의 사나이도 똑같이 중얼거렸다. 그런데 그 표정은 어딘가 비꼬는 듯했다. 나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서도 얄미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래, 너 말이야. 왜 그렇게 사냐고. 뭐가 그리 답답하냐고 묻는 거야. 기계처럼 돌아가면 기분 좋냐?”
이쯤 되니 심장이 두근거렸다. 저놈이 대체 뭘 알고 하는 말인가 싶었다. 한편으로는 알 수 없는 화가 올라왔다.
“아니, 난 그냥... 뭐, 뭐가 어때서? 난 그저 내 일 하고...”
그러자 우물 속 사나이가 콧방귀를 뀌듯 비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 네 일? 그게 너라고 믿는 거야? 기계처럼 살아가는 게 편할 것 같지? 생각할 것도 없고, 느낄 것도 없고…”
나는 한참 동안 말없이 우물 속 사나이를 쳐다보았다. 그동안 기계처럼 살아왔다는 게 그 놈의 입에서 나오니, 어쩐지 더 짜증이 났다. 누가 누구한테 그런 말을 하냐는 생각마저 들었다.
“야, 넌 누가 시비 걸라고 그 우물에 들어가 있는 거냐? 왜 나한테 이래라저래라야?”
우물가에서 무작정 뒤돌아 나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몇 걸음 걷다 말고 문득 생각이 들었다. 저놈이 미운 마음이 드는 한편, 어쩌면 그도 나만큼 가엾은 게 아닐까. 우물 속에 갇힌 채로 내 삶을 비웃어야만 하는 그 모습이, 어쩐지 나 자신을 바라보는 느낌과도 닮았다.
결국 나는 다시 우물가로 돌아갔다. 여전히 거기 있던 우물 속의 사나이는 이제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엔 눈빛에 슬픔이 담긴 것만 같았다.
“에휴, 나도 참... 가엾은 놈.”
그럼에도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어쩌면 그 놈이 날 비웃는 것 같아서, 저놈을 미워하다가도 다시 가엾게 느껴지다가 또다시 불쾌해졌다. 내 속을 들여다보는 이 우물 속 놈이 떠오를 때마다, 나 자신도 혼란스러웠다.
2장: 너는 누구냐?
그날 이후, 머릿속에서 우물 속 그놈의 얼굴이 떠나질 않았다. 한 번은 내가 스스로 환청을 들었거나, 그저 피곤해서 잠시 헛것을 본 거라고 생각해 보려 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그게 쉽지 않았다. 그놈의 비꼬는 말투와 당당한 눈빛이 머릿속에 계속 떠올랐다. 우물 속 사나이. 내가 나 자신에게 한 소리라고 하기에는 그놈이 너무 생생했다.
결국, 나는 며칠 후 다시 그 우물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번에는 그저 지나칠 수 없을 것 같았다. 도대체 저놈이 누구인지, 왜 내게 그렇게 시비를 거는지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물가에 다다르자마자 긴장감이 스쳐 지나갔다. 마음 한구석에서는 차라리 이번에는 조용히 우물만 들여다보고 돌아가면 좋겠다고도 생각했다. 그저 평범한 우물이라며 지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우물 속을 다시 들여다보자, 그놈은 이미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또 왔네?” 우물 속 사나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뭐? 나한테 할 말이 있어?”
사실, 나는 오기 전부터 생각해 둔 말이 있었다. 하지만 그놈이 또 나를 비웃을까봐 말문을 열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엔 놀랍게도 그놈은 비웃지 않았다.
“아니, 뭐... 난 여기 있고, 넌 또 여기 온 거잖아. 할 말이 있는 건 네 쪽 아닌가?”
그놈은 이번엔 진지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여전히 어딘지 모르게 얄미운 표정이었지만, 비꼬는 말투는 아니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사실, 우물 속 사나이에게 묻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 처음에는 그놈이 왜 이곳에 있는지, 대체 뭘 원하고 나에게 왜 이렇게 간섭하는지 알고 싶었다. 그런데 이 우물가에 두 번째로 찾아온 지금은 내 자신이 왜 이곳에 다시 와 있는 건지도 잘 모르겠었다.
“넌 대체 누구냐?” 나는 결국 물었다.
우물 속 사나이가 내 질문에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너잖아, 나.”
“뭐?” 나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
“넌 나고, 난 너야. 말이 좀 복잡해 보이긴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지.”
“그래서... 우물 속에 있는 내가 왜 자꾸 나한테 시비를 걸고 있는 거냐?”
그놈은 한참 동안 나를 쳐다보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글쎄... 넌 왜 나한테 자꾸 오는 거야? 그게 더 궁금하지 않아?”
이번에는 그놈의 질문이 나를 멍하게 만들었다. 왜 나는 자꾸 이 우물가로 발걸음을 돌리는 걸까? 그리고 왜 우물 속 사나이에게 이토록 신경이 쓰이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선뜻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우물 속에서 나를 바라보는 그놈의 얼굴은 도저히 무시할 수가 없었다.
나는 잠시 말을 잃고 생각에 잠겼다. 그러자 그놈이 다시 말을 걸었다.
“혹시 너, 내가 가엾어서 오는 건 아니지?”
나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하려 했지만, 그놈의 말에 내 마음 한편이 조금씩 흔들리는 걸 느꼈다. 어쩌면 그게 맞을지도 모른다. 우물 속 사나이가 나를 미워하는 것도, 비꼬는 것도 이해하고 있었지만, 묘하게도 그놈이 가엾게 느껴졌다. 마치 나 자신이 다른 누군가가 되어 내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아니야. 넌 그냥 내가 생각보다 별로라고 느껴서 미워지는 거겠지.”
그놈은 내 말을 듣자마자 갑자기 끼어들더니 대뜸 이렇게 말했다.
“넌 나를 미워해. 하지만 난 널 미워하지는 않아.”
이 말에 나는 어이가 없어 웃음이 터졌다. 우물 속 사나이와 나, 둘 다 나 자신을 미워하고 가엾어 한다는 사실이 조금 우스웠다.
“너도 참 어이없는 놈이다, 알지? 말은 그럴듯하게 하면서도 결국 너도 나랑 똑같잖아. 이런 상황에서 벗어날 방법을 생각하기보다는, 비웃기나 하고 말이지.”
사나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헛웃음을 지었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넌 나만큼 비꼬지는 않잖아. 그게 우리 사이의 유일한 차이일지도.”
“그래? 그럼, 너도 날 비꼬는 게 아니라 나처럼 엉뚱하게 살라는 말이라도 해 주려는 거냐?”
그 순간, 우물 속 사나이가 진지한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그리고는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나를 쳐다보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엉뚱하게 살 수 있으면, 너도 나도 조금은 덜 불행해지지 않을까?”
그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엉뚱하게 산다는 것.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곱씹을수록 나는 지금까지 너무도 정해진 길을 따라 기계처럼 살아온 건 아닌가 싶었다. 그동안 내 자신을 가두고 있었던 건 어쩌면 그놈이 아니라 나였는지도 모르겠다.
3장: 삶의 고뇌, 웃음으로 풀다
며칠이 지났다. 공장에서 일을 하면서도 우물 속 사나이와 나눴던 대화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내가 나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것 같으면서도, 그 놈은 나와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듯 보였다. 내가 내 마음을 들여다본다는 게 이런 기분일까? 아니면, 단지 내가 점점 미쳐가고 있는 걸까?
결국, 우물가에 다시 가보기로 했다. 이번에는 꼭 물어보고 싶었던 질문이 있었다. 내가 왜 이렇게 이상한 기분을 느끼는지, 그리고 나 자신을 왜 이렇게 미워하고 가엾게 여기는 건지 그놈에게 묻고 싶었다. 아마도 그놈은 답을 알고 있을 것 같았다.
공장에서 퇴근한 후 나는 곧장 우물가로 향했다. 오늘은 그놈이 어떤 답을 내놓을지 알 수 없지만, 대화하면 뭐든지 조금은 풀릴 것 같은 희망이 들었다. 우물가에 다다르며 속으로 ‘이번에도 그놈이 있을까?’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그놈은 거기에 있었다. 웬일인지 무척 편안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심지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왔네. 기다리고 있었다고는 안 할게. 너도 내가 널 기다리는 놈은 아니라고 생각할 테니까.” 우물 속 사나이가 농담을 던졌다.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우물가에 앉았다. “너 진짜 뭐냐. 왜 그렇게 말이 많냐?”
“나? 말 많은 건 너지. 난 그저 네가 던지는 질문에 답하는 중일 뿐이야.”
“그래, 좋다. 그럼 오늘은 좀 제대로 된 질문을 던져볼게.” 나는 몸을 기울여 우물을 들여다보았다. 그놈은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왜 내가 나 자신을 이렇게 미워하는 것 같냐? 뭐가 문제인 걸까?”
우물 속 사나이는 고개를 한참 기울이더니, 눈을 찡긋하며 웃었다.
“너, 정말 모르겠어? 그게 문제야. 넌 너무 많은 걸 고민해.”
“생각이 많다고? 그게 문제야?”
“그렇지. 네 머릿속엔 온갖 고민들이 얽혀 있지만, 그걸 푸는 방법은 언제나 하나뿐이라고 믿고 있잖아. 정답이 있다며 그것을 찾으려고 할 때마다 네 인생은 점점 더 꼬이는 거야.”
나는 어이없다는 듯 그놈을 쳐다보았다. “그래? 그럼 답을 찾지 말라는 거냐?”
“꼭 그렇진 않아. 다만, 네가 모든 걸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놈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을 이었다. “사실, 네가 지금처럼 엉뚱한 질문을 던지는 게 나쁘진 않아. 문제는, 네가 그 질문에 너무 많은 기대를 걸고 있다는 거지.”
“너무 많은 기대?”
“그래, 예를 들어, 넌 내가 여기 있는 이유나 네가 왜 나를 미워하는지를 알아내면, 마치 인생이 한꺼번에 풀릴 거라고 생각하지? 하지만, 그런 건 없어.”
우물 속 사나이는 다소 엉뚱한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내가 너와 이렇게 엉뚱한 대화를 나누는 동안, 너는 오히려 조금씩 나아지고 있어. 웃기지?”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 말이 왠지 맞는 것 같기도 했고, 동시에 더 혼란스러워졌다. 내가 이놈과 대화를 나눈다고 뭐가 달라지겠냐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도 그 놈이 얘기할 때마다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건 또 뭘까?
“그래, 웃기긴 하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는 건데?”
그놈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별거 없어. 웃으면 돼. 뭐든지 가볍게 받아들이는 게 때론 방법일 수도 있지. 너도 가끔은 기계처럼 살아가는 게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봐. 그게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지 말고.”
“웃으라고?” 나는 코웃음을 쳤다. “난 지금 내 인생이 꼬여 있다고 생각하는데, 웃는다고 다 해결될까?”
“웃으면 해결이 되진 않아도, 조금 덜 심각해질 순 있지 않겠어?”
그 말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웃음이 났다. 이렇게 진지하게 고민했던 문제에 대한 답이 단순히 웃으라는 거라니.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그 놈의 말에 뭔가 설득당하는 느낌이 들었다.
“알았어. 웃으면서 살아보자고. 뭐,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겠지.” 나는 다시 한 번 헛웃음을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순간, 우물 속 사나이가 빙그레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래, 그렇게 살면 좀 나아질 거야. 그런데 너, 진짜 이 우물가에 자주 오는 건 좀 이상하긴 하다, 인정?”
나는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너야말로 우물 속에 계속 있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냐?”
우물 속 사나이가 잠깐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렇긴 하지. 그런데 난 여기 있을 수밖에 없으니까.”
그 말에 나는 다시 웃음이 터졌다. 이 엉뚱한 대화 끝에 결국 기분이 풀린 나 자신이 우습기도 했고, 그놈이 말한 대로 모든 걸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게 어리석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됐다.
“그래, 다음에 또 올게. 너랑 얘기하면 기분이 좀 나아지니까.”
우물 속 사나이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마치 내가 그런 결론에 이르길 기다렸다는 듯이.
4장: 민수의 충고
며칠 후, 나는 회사에서 정민수와 함께 점심을 먹고 있었다. 민수는 여느 때처럼 무덤덤한 표정으로 밥을 먹고 있었고, 나는 대화 상대가 없다는 핑계로 숟가락을 천천히 움직였다. 머릿속에 자꾸 우물 속 사나이와 나눈 대화가 떠올랐고, 민수에게 얘기할까 말까 고민이 되었다.
“야, 민수야. 너 혹시... 우물에서 자기랑 얘기해본 적 있어?”
민수가 밥을 먹다 말고 눈을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고개를 갸웃하며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려는 눈치였다.
“우물에서 자기랑 얘기? 네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나는 민수의 반응이 웃겨서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당연히 이상한 소리겠지. 하지만 우물 속 사나이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 이제 나에게는 어느덧 익숙한 일이 되어버렸다.
“그냥... 이상한 얘기일 수도 있는데, 얼마 전에 우물가에 갔다가 내 모습을 봤어. 근데 그놈이 나한테 말을 걸더라고. 내가 하는 생각에 대답도 하면서, 나한테 충고까지 하는 거야.”
민수는 고개를 숙이고 천천히 숟가락을 움직이며 말없이 음식을 씹었다. 그는 대화를 천천히 곱씹는 성격이었다. 나보다 말수가 적은 그는 언제나 생각을 충분히 한 후에야 입을 열곤 했다. 한참 후에야 민수는 무덤덤하게 한 마디 던졌다.
“너... 병원에 가봐야 하는 거 아니냐?”
나는 그의 무심한 말투에 크게 웃어버렸다. 역시 민수답다. 엉뚱한 이야기를 이렇게 진지하게 받아들일 줄이야. 그래도 이 농담을 진지하게 설명해 줄 수밖에 없었다.
“아니, 농담하는 게 아니라 진짜라니까. 그놈이 나한테 너무 진지하게 살지 말라고 하더라고. 웃으면서 살면 좀 나아질 거라고.”
민수는 조용히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한 눈빛을 하다가, 숟가락을 내려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웃으라고? 그건 네가 늘 하던 얘기 아니냐? 너 원래 엉뚱한 녀석이었잖아. 우물 속 사나이가 아니라 네가 너 자신한테 그런 얘기 하는 게 더 맞을 거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을 곱씹었다. 하지만 진지하게 말했다. “아니야, 이번엔 뭔가 달라. 그놈이 나랑 똑같이 생겼는데, 나랑은 좀 다르게 살라고 충고를 하더라고.”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생각해 보면, 그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해. 나 진짜 요즘 너무 심각하게 살고 있잖아.”
민수는 나를 쳐다보다가, 다시 밥을 먹기 시작했다. 이내 무심한 듯 말했다.
“야, 생각해봐. 네가 그 우물 속에서 본 건 너잖아. 결국 네가 네 자신에게 그렇게 살라고 충고한 거라면, 그게 너한테 진짜 필요한 얘기일지도 모르잖아.”
나는 민수의 말에 멈칫했다. 그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우물 속 사나이가 나를 미워하고 비웃었다 해도, 결국 그놈은 나였다. 그리고 그놈이 말한 건 다 내가 나 자신에게 하고 싶었던 말일지도 모른다. 나는 너무 진지하게 살며, 매사에 답을 찾으려 애썼던 것이다.
“그래... 네 말도 맞는 것 같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왜 나는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해 주면서도, 정작 내 자신은 잘 하지 못하는 걸까?”
민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게 인간이지. 자기 자신에게 충고하는 건 쉽지만, 실천하는 건 어려운 법이거든.”
그 말에 나는 다시 웃음이 났다. 우물 속 사나이와 대화를 나누면서 나 자신을 미워하고, 가엾어하고, 때로는 그리워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그놈이 해 준 충고를 내 삶에 제대로 적용한 적은 없었다. 민수의 말처럼, 나는 그 충고를 듣고도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던 것이다.
“네가 엉뚱한 얘기 좋아하는 건 알겠지만, 그놈이 뭐라든 간에 네가 스스로 바꿀 수 있는 건 결국 네 행동이겠지. 가볍게 생각해봐. 진지하게 살지 말라고 네가 너한테 말했잖아.”
나는 민수의 말을 곱씹으며, 우물 속 사나이와의 대화에서 얻은 깨달음을 되새겼다. 이 엉뚱한 대화가 나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실마리가 조금씩 풀리는 것 같았다.
민수는 나에게 충고하면서도 여전히 밥을 먹고 있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공장에서 벌어지는 일상적인 대화처럼 자연스럽게.
“고맙다, 민수야. 네가 한마디 해 주니까 뭐가 좀 풀리는 것 같다.”
“어차피 네가 다시 우물가에 갈 거잖아. 그놈한테 가서 물어봐. 난 나랑 대화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서.”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 또 가야지. 너도 한 번 가봐라. 그놈이 너한테도 한마디 할 거다.”
민수는 그 말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됐어. 난 우물 속에서 누굴 만날 마음 없어.”
5장: 또 다른 만남
그날 이후, 우물 속 사나이와 나눴던 대화가 자주 떠올랐다. 민수의 충고도 한 번씩 머리를 스쳐 지나갔지만, 내 머릿속엔 여전히 그놈의 말들이 맴돌았다. 웃으면서 살면 조금 나아질 거라는 그놈의 말이 자꾸 떠올랐지만, 웃는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간단히 생각하고 넘길 수 없는 일들이 세상엔 많다는 것을 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놈의 말에 끌리는 건 사실이었다. 그래서 다시 우물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번에는 우물 속 사나이에게 그저 웃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걸 말해 보고 싶었다. 좀 더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눠야 할 것 같았다.
우물가에 도착하자마자 사나이는 마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걸어왔다.
“또 왔네? 왜 자꾸 와? 나 보고 싶어서 그런 거야?”
“아니, 뭐... 네가 무슨 신비한 해답이라도 줄 것 같아서.” 나는 팔짱을 끼고 우물 속 사나이를 바라보며 대꾸했다.
“그래, 뭔가 답을 찾았어? 아니면 또 내가 너한테 가르쳐줘야 하냐?”
나는 어이가 없어 살짝 웃음이 나왔다. 자아와 대화를 나누는 기묘한 상황이 이제는 익숙해졌지만, 사나이는 여전히 비꼬듯이 나를 웃기려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이번엔 네가 말한 대로 웃으면서 살아보려고 했어. 그런데…”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우물 속 사나이를 응시했다. “그렇다고 해서 인생이 그렇게 쉽게 풀리진 않더라. 그저 웃는다고 모든 게 해결되진 않잖아.”
사나이는 고개를 갸웃하며 내 말을 듣더니, 갑자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그게 문제야. 넌 여전히 뭔가 답을 찾으려고 애쓰고 있잖아. 웃는다는 게 마법 주문도 아니고, 그냥 네가 조금 덜 심각하게 받아들이라는 의미였을 뿐이야.”
나는 잠시 멈칫했다. 그의 말이 또 맞는 것 같았다. 나는 여전히 모든 걸 해결해야 한다는 압박감 속에 살고 있었다. 웃는다는 게 모든 문제를 푸는 해결책이 아니라, 그저 마음을 조금 가볍게 하라는 뜻이었다는 걸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 그럼 정말 중요한 건 뭐라고 생각해? 내가 이렇게 계속 답을 찾으려고 애쓰는 게 잘못된 거냐?” 나는 조금 더 진지하게 물었다.
우물 속 사나이는 잠시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맞아. 넌 뭔가를 풀려고 너무 애쓰고 있어. 하지만 인생이 그렇게 쉽게 풀리는 거라면, 그게 진짜 인생이겠어? 복잡하고 꼬이는 게 인생이니까, 그냥 그걸 받아들이고 좀 웃으면서 살아봐. 네가 나랑 이렇게 얘기하는 것 자체가 얼마나 엉뚱하고 웃기냐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물 속 사나이의 말에 점점 더 설득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 인생은 꼬이고, 답을 찾으려고 발버둥칠수록 그 답은 더 멀어진다.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무언가를 해결해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럼, 지금 내가 해야 할 건 뭔데?”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나이는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글쎄, 내가 보기엔 너 그냥 좀 더 즐겨도 될 것 같은데? 그동안 너무 무겁게 생각했잖아. 일하는 것도, 사람을 만나는 것도, 그냥 좀 가볍게 받아들이는 게 어때? 가끔은 엉뚱하게 사는 게 더 좋은 해결책일 수도 있지.”
사나이의 말은 여전히 엉뚱했지만, 이번엔 그 엉뚱함이 묘하게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인생을 너무 진지하게만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는 그의 말에 나는 조금씩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그래... 가볍게 받아들인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이제 좀 알 것 같아.” 나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렇지, 뭐. 너도 이제 내가 왜 여기 있는지 조금은 알겠지? 난 네가 너무 진지해지지 않도록 균형을 맞춰주는 존재야.”
우물 속 사나이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 미소를 보며 이제까지 너무 많은 고민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민수의 말처럼, 우물 속 사나이는 결국 나 자신이었다. 내가 내 자신에게 조금 더 너그러워지라고 말해 주는 존재였다.
“고맙다.” 나는 진심으로 말했다. “네가 없었으면 난 진짜 어떻게 됐을지 모르겠어.”
우물 속 사나이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뭐, 나니까 당연히 널 돕는 거지. 난 네 일부니까.”
그 말을 듣고 나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이 우스꽝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나는 처음으로 내 자신을 조금 더 이해하게 된 것 같았다. 우물 속 사나이는 내 안의 또 다른 나였고, 나는 그동안 내 자신에게 조금 더 가볍게 살라고 말하지 못했던 거였다.
“그럼 이제 너 안 보러 와도 되는 거냐?” 나는 장난스럽게 물었다.
사나이는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아니, 그건 아니지. 넌 가끔 와서 나랑 얘기해야 돼. 내가 널 계속 엉뚱하게 만들어줘야 하니까.”
나는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말이 이제는 이상하지 않았다. 그는 나의 일부분이었고, 때때로 그와 대화를 나누며 나 자신에게 더 솔직해질 필요가 있었다. 이제 나는 조금 더 여유로운 마음으로 그를 떠나며, 가볍게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6장: 사나이의 충고
우물 속 사나이와의 대화가 끝난 후, 일상에 조금씩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예전처럼 무거운 고민에 사로잡히기보다는, 사나이가 말한 대로 가볍게 생각하려고 애썼다. 문제는 여전히 있었지만, 더는 심각하게 여기지 않기로 마음먹으니 한결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었다.
우물가에서 받은 충고 덕분에 나는 조금씩 웃으면서 살아가고 있었지만, 마음 한편에는 여전히 찜찜한 구석이 남아 있었다. 사나이의 충고가 옳다고 생각하면서도, 정말 이것이 내 인생의 답일까 하는 의문이 자꾸 들었다. 웃으며 가볍게 살려고 해도, 세상은 여전히 진지하고 무거운 문제들로 가득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다시 우물가로 발길을 옮겼다. 이제는 이 사나이가 마치 내 인생 상담사라도 되는 것 같았다. 가볍고 유쾌한 그의 충고들은 내게 도움이 되었지만, 여전히 뭔가가 아쉬웠다. 이번에는 정말로, 인생에서 중요한 답을 듣고 싶었다.
우물가에 도착하자, 사나이는 이미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에도 그는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또 왔네? 진짜 너도 참 끈질기다. 이번엔 뭐가 궁금해서 왔냐?” 사나이는 비꼬듯 말했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사실 네가 한 말들... 웃으면서 살라고 한 그 말들, 다 맞는 것 같아. 근데, 정말 이게 다일까? 정말 인생에서 중요한 건 그냥 웃고 가볍게 사는 것뿐일까?”
사나이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또 진지한 질문이네. 네가 그런 생각에서 못 벗어나는 건 알겠지만, 그게 네 문제야. 계속 답을 찾으려고만 하잖아.”
“그럼 뭘 해야 하냐고!” 나는 답답한 마음에 소리쳤다. “그저 엉뚱하게 살라는 말뿐이면, 내 인생에 무슨 의미가 있겠냐고.”
사나이는 피식 웃으며 나를 쳐다봤다. “넌 아직도 인생에 의미를 찾으려고 하네. 인생에 의미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그 질문에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의미... 그래, 의미가 어디에 있을까? 나는 왜 이렇게 진지하게 생각하고,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걸까?
“의미가 없다면, 그저 살아가는 게 다냐?”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사나이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의미가 없다는 게 아니라, 네가 의미를 너무 진지하게 찾으려는 게 문제라는 거야. 의미라는 건, 네가 스스로 만드는 거지. 네가 웃으면서 살아가면 그게 네 인생의 의미고, 네가 고민하며 살아가면 그게 의미가 되는 거고. 인생은 네가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거야.”
그 말에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나이의 말처럼, 의미는 내가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동안 외부에서 답을 찾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중요한 건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가에 달렸던 것이다.
“그래... 결국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문제겠지.” 나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사나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 그리고 네가 조금 더 가볍게 받아들이면, 인생이 덜 힘들어질 거야. 문제는 사라지지 않겠지만, 그 문제를 어떻게 보느냐가 달라질 테니까.”
나는 사나이의 말을 듣고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이 엉뚱한 대화 속에서도 나는 내 인생의 답을 조금씩 찾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진지하게 고민하고 답을 찾으려 했던 모든 것들이, 사실은 내가 만들어내는 문제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말대로 해볼게. 좀 더 가볍게, 그리고 내가 원하는 의미를 만들어가면서 살아볼게.” 나는 다짐하듯 말했다.
사나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게 답이야. 그리고 네가 가끔 다시 나를 찾으면, 내가 또 다른 엉뚱한 충고를 해줄 테니까.”
나는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 너. 네가 있어서 내가 이렇게 살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되는 것 같아.”
사나이는 아무 말 없이 미소만 지었다. 이제 그 미소가 내 내면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동안 나는 너무 진지하게 살았고, 너무 많은 답을 찾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이제는 가벼운 마음으로,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의미를 만들어가며 살아가기로 결심했다.
7장: 우물 속의 비밀
며칠이 지나면서 더는 마음이 무겁지 않았다. 우물 속 사나이와의 대화는 내 삶의 방향을 가볍고도 명확하게 바꿔 놓았다. 민수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예전처럼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고 일상 속 작은 것들을 즐기기 시작했다. 공장에서의 단조로운 일들도 더는 숨 막히지 않았고,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에서도 자주 웃음을 터트리곤 했다.
그러다 문득 궁금해졌다. 도대체 우물 속 사나이는 언제부터 내 안에 있었던 걸까? 왜 하필 그 우물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을까? 우리는 이제 거의 친구처럼 되었지만, 그놈의 존재는 여전히 미스터리했다.
그래서 나는 다시 한 번 우물가로 향했다. 이번에는 그놈이 나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주기보다는, 그놈 자체에 대해 알고 싶었다. 우물 속 사나이는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고, 왜 나와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걸까?
우물가에 도착하자, 사나이는 여전히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를 보자마자 익숙한 미소를 지었다.
“또 왔네? 이번엔 뭘 또 물어보려고?”
나는 웃음을 지으며 우물가에 앉았다. 이제 그놈과의 대화는 나에게 일상이 된 듯했다.
“오늘은 네가 나한테 뭐라 충고할 차례가 아니라, 내가 너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사나이는 고개를 갸웃하며 나를 쳐다봤다. “뭘 물어보고 싶은데?”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우물 속의 사나이를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넌 도대체 언제부터 여기 있었어? 왜 여기서 나랑 대화를 나누는 거냐고.”
사나이는 피식 웃었다. 이번에는 다소 진지한 질문에 당황한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다 이내 평소처럼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내가 언제부터 있었냐고? 음... 네가 나를 발견한 그 순간부터 있었겠지.”
나는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넌 진짜 언제부터 여기 있었냐고. 내가 그동안 몰랐던 거냐, 아니면 네가 원래 존재하던 무언가였던 거냐?”
사나이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 한참을 고민한 끝에 조용히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네가 필요할 때부터 존재했어. 너는 몰랐겠지만, 네가 힘들 때마다 나는 네 안에 있었어. 다만 네가 그걸 보지 않았을 뿐이지.”
그 말을 듣고 나는 순간 멍해졌다. 내 안에 이미 그가 있었는데, 내가 몰랐던 걸까? 그동안 나 혼자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항상 그와 함께였다는 말인가?
“그럼... 네가 내가 필요할 때마다 나오는 거였어?” 나는 놀라며 물었다.
사나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뭐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한 거야? 난 그냥 네가 너 자신에게 더 잘해주지 못할 때 나타난 거야. 네가 나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면서야 비로소 나를 보게 된 거지.”
나는 그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동안 나는 내 자신을 너무 몰랐던 것 같다. 우물 속 사나이는 나 자신이었고, 내가 필요할 때마다 내 안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나는 그 존재를 무시하고, 너무 바쁘게, 너무 진지하게 살아왔던 것이다.
“그럼... 이제 넌 안 나타나는 거야? 이제 나 혼자도 괜찮다는 거야?”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나이는 고개를 저으며 미소를 지었다. “아니, 난 언제나 여기 있을 거야. 네가 필요할 때마다 나타날 거고, 네가 나를 다시 찾으면 내가 또 나와서 얘기해줄 테니까. 하지만 네가 나를 찾지 않더라도 괜찮아. 이제 너 스스로 나와 대화할 수 있잖아.”
그 말을 듣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이제 나는 스스로와 대화할 수 있게 되었다. 너무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도, 답을 찾기 위해 애쓸 필요도 없었다. 나는 나 자신을 충분히 믿고, 내 삶을 가볍게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고맙다, 너 진짜.” 나는 진심으로 말했다. “이제 나 혼자서도 괜찮을 것 같아.”
사나이는 그 말을 듣고 웃었다. “그래, 이제 너도 스스로 잘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가끔 내가 보고 싶으면 또 와라. 엉뚱한 얘기를 나누는 것도 나쁘진 않잖아.”
나는 웃으며 우물 속 사나이를 마지막으로 쳐다보았다. 이제는 더 이상 그놈이 미스터리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놈은 나였고, 나는 언제든 그놈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우물 속의 사나이는 내 내면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고, 나는 이제 그놈과 더 이상 헤어질 필요가 없었다.
나는 곧 우물가를 떠나며 마음속으로 속삭였다. “잘 있어, 내 친구.”
사나이의 웃는 얼굴이 그 우물 속에 남아 있는 것을 뒤로한 채,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길을 걸어갔다. 이제 나는 내가 필요할 때마다 스스로에게 조언을 해줄 수 있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그 깨달음 덕분에, 나는 앞으로도 삶을 가볍게, 자유롭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8장: 또 다른 자화상
그날 이후, 나는 다시 우물가로 가지 않았다. 아니,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었다. 우물 속 사나이와의 대화는 내 삶에 큰 변화를 가져왔고, 이제 나는 그놈 없이도 충분히 나 자신과 대화할 수 있었다. 공장에서의 일상도 더는 무겁게 느껴지지 않았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더 가볍고 편안한 마음으로 대할 수 있었다.
가끔은 우물 속 사나이가 그리워지기도 했다. 그의 엉뚱한 말들이 떠오를 때마다 웃음이 나곤 했다. 하지만 그가 없어도 나는 이제 내 스스로를 돌아보며 가벼운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 언제든 내 안에 그 목소리가 살아 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어느 날, 나는 문득 자화상을 그려보고 싶어졌다. 그동안 나는 내 자신을 제대로 들여다본 적이 없었다. 우물 속 사나이와의 대화 덕분에 많은 것을 깨달았으니, 이제는 그 깨달음을 담아 새로운 나 자신을 그려보고 싶었다.
종이와 연필을 들고 책상 앞에 앉았다. 거울 속 내 얼굴을 바라보며 천천히 그려나갔다. 처음엔 내 모습이 어색하고 낯설게 느껴졌다. 마치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그리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계속해서 그려나가자, 점차 내 안에 있던 그 사나이의 미소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너는 나고, 나는 너다.’ 우물 속 사나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 말은 이제 더 이상 수수께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나 자신을 너무 몰랐고, 그놈은 그 사실을 일깨워준 존재였다. 지금은 그 놈이 나였음을, 그리고 그 또한 나였음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새로운 자화상을 완성했다. 예전에는 나 자신을 미워하고, 가엾게 여기고, 때로는 그리워했지만, 이제는 나를 이해하고 있었다. 그림 속 내 모습은 편안하게 웃고 있었다. 진지하게 고민하고 답을 찾으려 애쓰던 내가 이제는 가볍게, 웃으며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된 것이다.
완성된 자화상을 바라보며, 나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얼굴이 조금은 엉뚱하게 그려졌지만, 그것마저도 좋았다. 예전 같았으면 완벽하게 그려야 한다고 생각했겠지만, 이제는 그저 이렇게 살아가면 된다는 마음이 들었다. 가볍게, 엉뚱하게, 때로는 아무 의미 없이 웃으면서.
그 자화상은 지금 내 방 한쪽에 걸려 있다. 우물 속 사나이는 이제 사라졌지만, 나는 그와의 대화를 통해 내 안의 새로운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내 삶에 필요한 존재였고, 그 덕분에 나는 진정한 자아를 찾을 수 있었다.
이제 나는 내 인생의 또 다른 자화상을 그려 나갈 준비가 되어 있다. 더는 답을 찾으려고 애쓰지 않고, 그저 나 자신을 믿으며, 웃으면서 살아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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