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Writing) 182

Short story) 살구나무의 날개

살구나무의 날개> 1장: 내전의 그림자혼란은 갑작스러웠다.지우는 새벽부터 이어진 긴 진료를 마치고 병원의 낡은 복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밖에서는 총성과 비명이 간헐적으로 들려왔고, 곳곳에서 타오르는 불빛이 병원 창문을 통해 붉게 스며들었다.외곽의 작은 병원이었지만, 난민들과 부상자들로 가득 찬 병원은 이미 통제 불가능한 상태였다. 의료진은 턱없이 부족했고, 들어오는 환자들은 하루가 다르게 늘어났다.“지우, 수술실 쪽 좀 도와줘!”간호사 민정이 절박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지우는 피로를 떨치고 달려갔다. 수술대 위에는 중년 남자가 심각한 총상을 입은 채 놓여 있었다.“지금 상태로는 수혈이 필수예요. 하지만…”민정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병원에는 수혈에 필요한 혈액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방법이 없으면 ..

Short story) 눈 속의 꽃

눈 속의 꽃> 제1장. 눈이 내리던 그날겨울이 깊어가고 있었다. 하얗게 내린 눈은 거리를 고요하게 만들었지만, 이현수의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요란했다. 철학 카페 ‘로고스’의 창문 밖, 바닥까지 길게 늘어진 커튼 사이로 흩날리는 눈발이 보였다. 그날의 기억은 너무 생생해서 마치 어제의 일처럼 그의 머릿속을 떠다녔다.“현수, 당신의 논리로는 이별을 해결할 수 없어.”그녀가 남긴 마지막 말은 그의 가슴에 깊은 틈을 남겼다. 최수진. 그녀는 평온하면서도 날카로운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 후, 그의 앞에서 떠났다. 아니, 정확히는 자신이 그의 뒤에 남겨졌다고 느꼈다. 눈발 속으로 걸어가던 그녀의 뒷모습은 흐릿해지다가 완전히 사라졌다.이현수는 철학자였다. 삶의 복잡한 감정을 논리의 언어로 분석하며, 이성을 통해 모..

Short story) 두 갈래의 길

두 갈래의 길> 1장: 산골로의 부름고속도로를 벗어나 좁은 산길로 접어들자, 도로 양옆으로 빽빽한 나무들이 길을 감싸기 시작했다. 강유진은 잠시 창문을 내리고 시원한 바람을 맞았다. 도시의 삭막한 공기와는 다른, 풀 냄새와 흙 내음이 섞인 공기가 밀려왔다. 하지만 그는 곧 창문을 닫았다. “자연이 좋긴 해도, 너무 과하면 불편하지.” 차 안을 가득 채운 서류 더미와 노트북 화면에 시선을 돌리며 스스로에게 말했다.그가 도착한 목적지는 작은 산골 마을, 오록리였다. 회사가 추진 중인 태양광 발전소 프로젝트가 이곳에서 큰 문제에 부딪혔다. 마을 주민들과 환경 운동가들의 반발로 공사가 중단되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현장 엔지니어였던 유진이 직접 파견된 것이다.주민센터 앞에 도착했을 때, 유진은 작은 시위대를 ..

Short story) 별빛 아래, 우리가 찾은 길

별빛 아래, 우리가 찾은 길>1장: 빛과 그림자의 시작도시의 밤하늘은 어두웠다. 화려한 네온사인이 빌딩 벽에 반사되어 번쩍였지만, 그 아래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숙이고 바쁘게 움직일 뿐이었다. 유나는 높은 빌딩 창문 너머로 꺼져버린 별빛을 떠올렸다.“이 도시에는 별이 없다.”어릴 적, 별을 보며 소원을 빌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고향 마을의 그 맑고 빛나던 밤하늘, 그리고 그곳에서의 따스한 추억. 그러나 지금의 유나는 그 별빛을 되찾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사람들의 욕망과 현실의 타협으로 만들어진 기업 광고 자료가 들려 있었다.“이번 투자 컨퍼런스에서는 소비자의 감정을 자극하는 메시지를 강조하세요. ‘전통과 현대의 만남’ 같은 키워드가 잘 먹힐 겁니다.”유나는 회의실에서..

Short story) 거울 속의 투자자

거울 속의 투자자> 제1장: 녹슨 거울 속의 나을지로의 한적한 고시원, 오래된 형광등이 깜빡이고 방 한구석에는 빛바랜 거울이 놓여 있다. 이도현(29세)은 매일 같은 패턴의 삶을 반복한다. 컴퓨터 화면에 떠오르는 숫자와 그래프는 그의 유일한 친구다. 고시원 창문으로 들어오는 서울의 빛은 희미하다.과거 스타트업 창업자로 찬사를 받던 그는 이제 누구의 관심도 받지 않는 존재였다. 러닝브릿지. 저소득층 학생들에게 맞춤형 학습 기회를 제공한다던 플랫폼은 결국 데이터 판매 스캔들로 무너졌다."내가 한 선택이 수많은 사람의 삶을 망쳤다."책상 위에는 러닝브릿지의 마지막 투자 계약서 조각이 놓여 있다. 과거의 실패를 되새기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그는 은둔 생활을 지속한다.민수와의 우연한 재회야간 아르바이트를 마치..

Short story) 돌담길 끝에서 사랑을 말하다

돌담길 끝에서 사랑을 말하다> 1장: 말의 무게서울 한복판, 옛 정취가 깃든 돌담길. 현대의 빌딩 숲 사이에 자리 잡은 이곳은 마치 시간의 균열 속에 고스란히 멈춰선 듯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돌담 하나하나는 손길의 흔적이 담긴 도시의 기억이었다.윤채운은 돌담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작은 메모장을 손에 쥐고, 그 안에 적힌 문장을 천천히 읊조렸다. "언어는 세상을 설명하기 위한 도구다. 하지만 과연 모든 감정을 설명할 수 있을까?"그의 목소리는 낮았고, 혼자 중얼거리는 모습은 마치 자기 자신과 싸우는 철학자 같았다.그는 오늘도 답을 찾고자 애썼다. 철학 연구자라는 타이틀이 붙어있었지만, 그것은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에서 비롯된 개인적 탐구에 지나지 않았다. 어릴 적 부모의 끊임없는 다툼 속에서 채운은 언어..

Short story) 문운당의 시작

1장: 철학이 사라진 시대겨울의 한가운데, 대학 강의실은 그 어느 때보다 차가웠다.이종화는 책상을 두드리는 손을 멈추고 강의실을 둘러보았다. 학생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거나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앞에 놓인 그의 강의안에는 굵은 글씨로 적혀 있었다.“철학은 질문하는 법을 가르친다.”“철학이 왜 필요한지 아는 사람?”그는 조용히 질문을 던졌다.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침묵뿐이었다. 한참이 지나 학생 하나가 어색하게 고개를 들었다.“교수님, 철학이 밥 먹여주나요?”강의실 한쪽에서 웃음이 터졌다. 이종화는 차가운 공기에 잠긴 듯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밥.그는 그 단어를 곱씹었다. 철학은 현실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질문조차 사치가 되어버린 시대. 그게 지금이었다.그날 밤, 이종..

Short story) 새로운 시대의 문우당

1장: 질문이 사라진 시대1. 차가운 효율의 세상2050년의 도시는 조용하고 완벽했다.회색빛 건물들이 빼곡히 하늘을 가리고 있었고, 도로에는 자율주행 차량이 소리 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헤드셋을 착용한 채 거리를 걸었고, 누구도 서로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공기처럼 스며든 AI는 사람들의 하루를 효율적으로 설계해주었다.아침이면 가상 비서가 가장 건강한 메뉴를 추천했고, 오늘의 업무 스케줄과 최적의 이동 경로를 알려주었다.“당신의 하루를 최적화합니다. 행복 지수 97%를 유지하세요.”화면 속 AI가 상냥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어딘가 텅 빈 표정 같았다.2. 최나현, 감정을 모방하다최나현은 거대한 디지털 타워의 37층 연구실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눈앞에는 가상 화면이 떠 있었고, 그 속에는..

Short story) 문우당, 시간의 페이지

1장: 흐르는 시간, 멈춘 페이지비가 그친 오후.창밖으로 흘러내리는 빗방울 자국들이 햇빛에 반짝이고 있었다. 도시의 골목길은 여전히 젖어 있었지만, 그 위를 걷는 사람들은 제각기 바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작은 서점이 있던 자리. 그곳에는 이제 공터만이 남아 있었다.이윤은 그 자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없어졌구나.”낡은 가죽 가방을 어깨에 멘 채, 그는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문우당.이윤에게 그 이름은 언제나 비 오는 날의 고요와 같았다. 철학과 시가 사람들에게 속삭이는 공간이었고, 그가 펜을 들 때마다 세상과 연결될 수 있었던 유일한 자리였다.“당신의 시는 시대와 맞지 않습니다.”출판사 편집장의 말이 다시금 귓가를 때렸다. 첫 시집 **『비가 그친 시간』**이 세상에 나왔지만, 평은 냉혹했다. 아름답지..

Short story) 비와 철학의 서점

비와 철학의 서점> 1장: 위기의 문우당비가 내리는 오후였다.낡은 철학 서점 **‘문우당’**의 창문을 타고 투명한 빗방울들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윤은 카운터에 앉아 엎드린 채 펜을 쥐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손때 묻은 노트가 펼쳐져 있었지만, 오늘따라 아무런 단어도 적히지 않았다. 시를 쓰겠다는 욕심조차 비에 씻겨 내려가 버린 기분이었다.“비가 오는 날은 손님이 더 없네. 참 신기하지.”이윤이 고개를 들자, 문우당의 주인인 이종화 교수가 허공에 말을 던지고 있었다. 이종화 교수는 고색창연한 나무 선반 앞에 서 있었다. 낡은 철학서와 문학책들이 가지런히 꽂힌 그 선반은 시간이 멈춘 공간처럼 보였다. 마치 ‘여기서만큼은 어떤 변화도 허락되지 않는다’는 고집스러운 선언처럼.이윤은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