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리에서 흔들리는 깃발과 사라진 아우성>
# 1장: "푸른 해원으로의 초대" - 나폴리에서 시작된 여정
은희는 나폴리 중앙역에 도착하자마자 자신의 여행가방에서 노트 하나를 꺼내들었다. 유치환의 '깃발'이 적힌 그 노트는 이미 수십 번을 읽어 귀퉁이가 접혀있었다.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그녀는 중얼거리다 멈췄다. 왜 하필 나폴리일까? 스무 살의 문학도가 선택한 이 도시는 너무나도 멀고, 더없이 낯설었다.
"시뇨리나! 택시 타실래요?"
귀에 익숙하지 않은 이탈리아어가 날아들었다. 은희는 고개를 저었다. 구글 맵으로 찾아본 호스텔까지는 걸어갈 수 있는 거리였다. 그녀는 이어폰을 꽂고 걷기 시작했다.
첫 발걸음부터 나폴리는 은희의 상상과 달랐다. 인스타그램에서 본 낭만적인 골목길 대신, 그래피티로 뒤덮인 지저분한 벽과 귀청이 터질 듯한 오토바이 소리가 그녀를 맞이했다. 이게 진짜 나폴리구나, 그녀는 생각했다.
호스텔로 가는 길에 그녀는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 저 멀리 지중해가 보였다. 푸른 물결 위로 하얀 요트들이 점점이 떠 있었고, 멀리 베수비오 화산이 그림처럼 자리잡고 있었다. 은희는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내려다 말았다. 이건 찍어서 될 게 아니야.
"아, 맞다!" 은희는 호주머니를 뒤적여 구겨진 쪽지를 꺼냈다. 나폴리 대학의 마르코 교수가 보낸 이메일을 프린트한 것이었다. '깃발'에 대한 논문을 쓰겠다는 그녀의 이메일에 교수는 의외로 빠르게 답장을 보내왔다.
"전설적인 '깃발'이 있는 해변으로 가보세요. 거기서 당신이 찾는 '소리 없는 아우성'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 거예요."
은희는 쪽지를 다시 호주머니에 넣었다. 뭔가 이상했다. 교수는 왜 '전설적인'이라는 표현을 썼을까? 시인의 은유가 실제 장소와 무슨 관련이 있다는 걸까?
저녁이 되자 호스텔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닷바람이 은희의 머리카락을 살랑거렸다. 그녀는 노트북을 켜고 내일의 일정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와이파이 비밀번호가 뭐예요?"
옆 침대의 외국인이 물었다. 은희는 고개를 들었다.
"아, 그게..." 그녀가 말을 잇기도 전에 옆 침대의 사람이 한숨을 쉬었다.
"미안해요. 제가 한국어를 써서 놀라셨죠? 전 마리오예요. 한국에서 3년 살았어요."
은희는 잠시 당황했다. 이렇게 우연히 한국어를 하는 사람을 만날 줄이야. 하지만 이게 바로 여행이 주는 특별한 선물 아닐까? 그녀는 살짝 미소 지었다.
# 2장: "서로 다른 깃발, 서로 다른 아우성" - 루카와의 만남
"마리오가 아니라 루카예요."
다음 날 아침, 호스텔 앞에서 다시 만난 그는 씩 웃으며 말했다.
"어제는 장난스러운 기분이었거든요. 사실 저도 무언가를 찾고 있어요."
은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루카는 검은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어쩐지 그의 모습이 어제와는 달라 보였다. 마치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혹시... 깃발에 대해 들어본 적 있나요?"
은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루카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가 이내 환하게 펴졌다.
"아, 그 전설 말이죠? 제가 안내해드릴까요?"
루카는 은희를 좁은 골목길로 안내했다.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메인 스트리트를 벗어나자 갑자기 조용해졌다. 벽에는 'La bandiera dell'eternità'라고 쓰여 있었다.
"영원의 깃발이라는 뜻이에요."
루카가 설명했다.
"옛날 이 거리에 깃발이 하나 있었대요. 바람이 불지 않아도 늘 펄럭이는..."
은희는 루카의 이야기를 들으며 메모를 하려다 말았다. 뭔가 이상했다. 루카의 말투에는 진지함과 장난스러움이 묘하게 섞여 있었다. 마치 진실을 말하는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허구를 만들어내는 것 같았다.
"그런데 말이죠..."
루카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당신이 찾는 건 진짜 깃발이 아니라 소리 없는 아우성이잖아요?"
은희는 흠칫 놀랐다. 어떻게 알았지? 그녀가 의아해하자 루카는 호주머니에서 구겨진 종이 하나를 꺼냈다. 마르코 교수의 이메일이었다.
"저도 같은 이메일을 받았어요. 교수님이 우리를 연결시켜준 거죠."
루카가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전 이미 포기했어요. 그 깃발은... 음, 어쩌면 우리 모두의 환상일지도 모르죠."
은희는 혼란스러웠다. 이게 다 우연일까? 아니면 누군가가 계획한 것일까?
그때였다. 골목 저편에서 수상한 그림자가 보였다. 파란 코트를 입은 키 큰 남자였다.
"미스터 블루..."
루카가 중얼거렸다.
"그를 조심하세요. 그는 이 전설을 너무 진지하게 믿거든요."
은희는 루카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이 진지해져 있었다.
"그럼 당신은 안 믿나요?"
"전 믿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루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골목길에서 갑자기 바람이 불어왔다. 마치 누군가가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는 것 같은 바람이었다. 은희의 노트가 펄럭였고, 루카의 검은 티셔츠도 흔들렸다.
"이게 바로 나폴리예요."
루카가 씁쓸하게 웃었다.
"당신의 시처럼, 모든 것이 소리 없이 아우성치는 곳이죠."
# 3장: "미스터 블루의 초대장" - 내면의 진실을 향한 도전
"깃발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모든 곳에 존재하죠."
미스터 블루는 오래된 카페의 구석자리에서 이상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의 파란 코트 주머니에서는 끊임없이 종이 조각들이 삐져나왔다가 다시 들어갔다. 마치 포켓 속에 작은 선풍기라도 든 것처럼.
"교수님이 보내신 거예요?"
은희가 물었다.
"아뇨, 전 교수가 아닙니다. 그저... 관찰자죠."
루카는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또 그런 수수께끼 같은 말씀만 하시네요. 제발 직접적으로 말씀해주세요."
미스터 블루는 갑자기 테이블 위에 세 장의 종이를 펼쳤다. 각각의 종이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그림들이 그려져 있었다.
"첫 번째는 당신의 깃발입니다, 은희 씨."
그는 첫 번째 종이를 가리켰다. 거기엔 한글로 쓰여진 시구절들이 마치 깃발처럼 휘날리는 모양으로 그려져 있었다.
"완벽해지고 싶은 욕망, 하지만 그 완벽함이 당신을 질식시키고 있죠."
은희는 놀라서 뒤로 물러섰다. 그는 어떻게 알았을까?
"두 번째는 루카의 깃발입니다."
두 번째 종이에는 찢어진 티켓들이 깃발처럼 그려져 있었다.
"음악가가 되고 싶었죠? 하지만 현실은 호스텔 리셉셔니스트..."
루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만하세요!"
"마지막은 제 깃발입니다."
세 번째 종이는 백지였다.
"보이시나요? 제 아우성이..."
은희와 루카는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미스터 블루는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내일 해 질 녘, 포실리포 절벽으로 오세요. 거기서 우리는 각자의 깃발을 날릴 겁니다."
그가 일어서려는 순간, 은희가 물었다.
"잠깐만요! 어떻게 우리에 대해서 그렇게 잘..."
"아, 맞다."
미스터 블루는 주머니에서 작은 종이배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이건 제 명함입니다."
종이배를 펼치자 거기엔 이상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당신의 아우성이 들립니다. 네모난 하늘 아래서 우리는 모두 날지 못하는 깃발입니다.'
"미친 사람이에요."
루카가 중얼거렸다.
"그래도 가보실 건가요?"
은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가봐야 할 것 같아요. 그리고..."
그녀는 미스터 블루가 놓고 간 세 장의 종이를 바라보았다.
"이상하게도 이 사람의 광기가... 우리를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아요."
카페 밖으로 나오자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우산도 없이 걸으면서 은희는 생각했다. 어쩌면 이 비가, 그들 모두가 참아왔던 눈물일지도 모른다고.
# 4장: "지중해의 바람에 실린 소리" - 문화와 결핍의 교차
다음 날 아침, 은희와 루카는 나폴리 국립고고학박물관 앞에서 만났다. 둘 다 미스터 블루의 기이한 제안을 잊지 못한 듯했다.
"피자 먹을래요?"
루카가 갑자기 물었다.
"진짜 나폴리 피자요. 관광객용 말고."
은희는 잠시 고민했다. 지금이 피자 먹을 때인가? 하지만 루카의 표정이 진지했다.
좁은 골목 안쪽, 허름한 가게 앞에 서자 루카가 말했다.
"여기가 제가 어릴 때부터 오던 곳이에요. 할아버지가 데려오셨죠."
피자는 놀라울 정도로 단순했다. 토마토 소스와 모차렐라, 바질잎 몇 장이 전부였다.
"마르게리타예요."
루카가 설명했다.
"이탈리아 국기의 색이죠. 빨강, 하양, 초록... 우리도 이렇게 각자의 깃발을 들고 있나 봐요."
은희는 피자 한 조각을 집어들며 물었다.
"그런데 루카 씨는... 정말 음악가였나요?"
루카의 표정이 굳었다가 풀어졌다.
"네. 재즈 피아니스트였죠. 꿈만 같았어요. 하지만..."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제 연주는 늘 부족했어요. 완벽하지 않다고 해서, 결국 무대에서 내려왔죠."
"저도 그래요."
은희가 작게 말했다.
"늘 부족하다고 생각해요. 시를 읽어도, 글을 써도... 그래서 이곳까지 왔나 봐요."
루카는 웃었다.
"우리 참 비슷하네요. 각자 다른 나라, 다른 문화에서 왔는데..."
"근데 말이에요."
은희가 피자를 씹으며 말했다.
"미스터 블루가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아는 것 같지 않아요? 마치..."
"마치 우리의 소리 없는 아우성을 들은 것처럼요?"
루카가 말을 받았다.
그때였다. 가게 밖에서 누군가가 아코디언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익숙한 곡이었다. 은희는 깜짝 놀랐다.
"이거... 아리랑인가요?"
루카도 놀란 표정이었다.
"맞아요. 제가 예전에 편곡한 버전이에요. 근데 어떻게..."
둘은 서둘러 가게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거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단지 바람만이 불고 있었다.
"나폴리가 이상해지고 있어요."
루카가 중얼거렸다.
"마치 우리의 이야기를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아요."
은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이곳에 온 이후로 처음으로, 자신의 부족함이 부끄럽지 않다는 것을.
# 5장: "각자의 깃발을 찾아서" - 이상과 현실의 괴리
오후의 나폴리는 한층 더 무더웠다. 은희와 루카는 산타루치아 해변을 따라 걸었다. 절벽 약속 시간까지는 아직 몇 시간이 남아있었다.
"저기 보이는 성이 카스텔델로보예요."
루카가 바다 쪽을 가리켰다.
"재미있는 전설이 있는데... 어?"
그는 말을 멈추고 주머니를 뒤적였다. 그리고는 구겨진 악보 한 장을 꺼냈다.
"이상하네요. 이건 제가 마지막으로 작곡한 곡인데..."
은희도 가방을 열었다. 그녀의 노트에는 없었던 시구가 적혀있었다.
'푸른 바다처럼 깊어진 그리움이
검은 절벽 위에서 노래하네
소리 없는 멜로디가
깃발처럼 휘날리는 이곳에서...'
"제가 쓴 것 같은데... 기억이 안 나요."
은희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혹시..."
루카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우리가 찾는 게, 사실은 우리 안에 있는 건 아닐까요?"
그때 갑자기 바람이 불었다. 은희의 시와 루카의 악보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둘은 황급히 종이들을 잡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괜찮아요."
루카가 웃었다.
"어차피 완벽하지 않은 곡이었어요."
은희도 따라 웃었다.
"저도요. 완벽하지 않은 시였죠."
그들은 카스텔델로보 앞 벤치에 앉았다. 햇살이 바다를 반짝이게 만들었다.
"제가 음악을 그만둔 진짜 이유를 말씀드릴까요?"
루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완벽하지 않아서가 아니었어요. 너무 완벽하려고 했던 거죠. 매번 실수할까 봐 두려워서... 결국 진짜 제 음악을 잃어버렸어요."
은희는 자신의 노트를 바라보았다.
"저도... 유치환 시인처럼 쓰고 싶었어요. 완벽한 시를 쓰고 싶어서... 하지만 그러다 보니 제 목소리를 잃어버린 것 같아요."
"우리 참 바보 같죠?"
루카가 웃으며 말했다.
"각자 다른 깃발을 찾아 헤매다가, 알고 보니 그 깃발이 우리를 가두고 있었네요."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둘의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은희는 문득 유치환의 시구를 떠올렸다.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맞아요."
루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의 완벽함에 대한 집착이 결국 소리 없는 아우성이 된 거예요."
해가 조금씩 기울기 시작했다. 포실리포 절벽으로 가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루카 씨."
은희가 불쑥 말했다.
"오늘 절벽에서... 우리만의 깃발을 만들어볼까요? 완벽하지 않아도 되는, 그냥 우리인 채로의 깃발요."
루카의 눈이 반짝였다.
"좋아요. 아주 좋아요. 제가 멜로디를 만들고, 은희 씨가 가사를 쓰는 거예요."
두 사람은 벤치에서 일어났다. 이제 그들은 알았다. 미스터 블루가 그들을 왜 절벽으로 부른 건지.
그리고 그들의 진짜 깃발이 무엇인지도.
# 6장: "공중에 걸린 그리움" - 상실과 아우성의 정체
포실리포 절벽에 도착했을 때, 해는 이미 지평선을 향해 기울어져 있었다. 미스터 블루는 절벽 끝에 서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셨군요."
그의 파란 코트가 바람에 펄럭였다.
"준비는 되셨나요?"
은희와 루카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루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네. 하지만 좀 다른 방식으로요."
미스터 블루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른 방식이라..."
은희가 새로 쓴 시를 꺼내들었다. 루카는 휴대폰으로 간단한 멜로디를 녹음해두었다.
"이게 우리의 깃발이에요."
은희가 말했다.
"완벽하지 않아요. 하지만 진짜예요."
그때였다. 미스터 블루가 갑자기 크게 웃기 시작했다. 그의 웃음소리가 절벽을 타고 메아리쳤다.
"드디어... 드디어 찾으셨군요!"
그가 외쳤다.
"당신들의 진짜 아우성을!"
그러더니 그는 자신의 파란 코트를 벗었다. 놀랍게도 그 아래에는 평범한 티셔츠 차림의 노교수가 있었다.
"저는 마르코입니다."
그가 말했다.
"이메일을 보낸 그 교수죠."
은희와 루카는 놀라서 말을 잇지 못했다.
"가끔은..."
마르코 교수가 말을 이었다.
"우리가 찾는 것이 이미 우리 안에 있다는 걸 깨닫기 위해, 긴 여행이 필요합니다. 당신들의 여정이 바로 그거였죠."
석양이 절벽을 붉게 물들였다. 은희는 자신이 쓴 시를 소리 내어 읽기 시작했다.
'불완전한 우리가
서로의 아픔이 되어
나폴리의 하늘을 날 때
비로소 깨달았네
소리 없는 것들의 진실을...'
루카의 멜로디가 은희의 시와 어우러졌다. 단순하지만 진심이 담긴 곡조였다.
"보이시나요?"
마르코 교수가 지평선을 가리켰다.
"저기, 당신들의 깃발이 펄럭이고 있어요."
황혼의 바다 위로 무언가가 일렁이고 있었다. 그것은 실체가 있는 깃발은 아니었다. 하지만 분명히 거기 있었다.
은희와 루카의 불완전한 예술이 만들어낸, 가장 완벽한 순간이었다.
# 7장: "마음속 바람에 흔들리는 깃발" - 서로의 결핍을 받아들이다
"그럼 이제 마지막 단계입니다."
마르코 교수는 주머니에서 두 장의 종이를 꺼냈다.
"각자의 상실을 적어보세요. 그동안 완벽해지려고 노력하면서 잃어버린 것들을요."
은희와 루카는 절벽 근처 돌 위에 앉아 글을 쓰기 시작했다. 붉은 노을이 그들의 종이를 물들였다.
은희가 먼저 읽기 시작했다.
"나는 잃어버렸다
스무 살의 서툰 시들을
맞춤법이 틀린 첫사랑 편지를
무대 위에서 떨리던 목소리를
그리고... 날것 그대로의 나를"
루카도 자신의 종이를 들었다.
"나는 피아노 앞에서 실수할 때마다
조금씩 나 자신을 지워갔다
완벽한 음악가가 되기 위해
불완전한 나를 숨겼다"
마르코 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그 종이를 날려보내세요."
"잠깐만요!"
은희가 갑자기 외쳤다.
"루카 씨, 우리 이거 종이비행기로 만들어요."
루카가 웃었다.
"네? 갑자기요?"
"그래요. 우리답게 해요. 뭔가... 좀 엉뚱하고 완벽하지 않게요."
둘은 서툰 손놀림으로 종이비행기를 접었다. 은희의 것은 한쪽 날개가 찌그러졌고, 루카의 것은 비뚤어졌다.
"자, 이제..."
마르코 교수가 말하려는 순간, 은희가 끼어들었다.
"하나, 둘, 셋! 날아라, 불완전한 우리들!"
두 대의 종이비행기가 나폴리의 황혼 속으로 날아갔다. 은희의 비행기는 빙글빙글 돌다가 절벽 아래로 떨어졌고, 루카의 비행기는 갑자기 위로 솟구쳤다가 바다 쪽으로 사라졌다.
"어... 좀 실패한 것 같은데요?"
루카가 머쓱하게 말했다.
하지만 은희는 웃고 있었다.
"아니요, 완벽해요. 우리같이 엉뚱하고 어설프게 날아간 게... 정말 우리답잖아요?"
마르코 교수도 따라 웃었다.
"맞습니다. 깃발은 완벽하게 펄럭일 필요가 없어요. 그저 자신만의 방식으로 나부끼면 되는 거죠."
그때였다.
갑자기 어디선가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은희의 시와 루카의 멜로디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소리였다. 하지만 분명 그들은 아무것도 틀어놓지 않았다.
"이건..."
루카가 놀란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폴리의 마법이죠."
마르코 교수가 미소 지었다.
"이곳은 가끔 우리의 진심을 소리로 만들어내곤 합니다."
은희는 눈을 감았다. 자신의 서툰 시가 루카의 불완전한 멜로디와 만나 만들어내는 소리가, 이상하게도 그녀가 지금까지 들어본 것 중 가장 아름다웠다.
"이게 우리의 진짜 아우성이구나..."
그녀가 작게 중얼거렸다.
# 8장: "마지막 아우성" - 결핍과 유대의 해원으로
다음 날 아침, 은희는 호스텔 방에서 마지막 짐을 싸고 있었다. 창밖에서는 나폴리의 소란스러운 아침이 시작되고 있었다.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루카였다. 그의 손에는 낡은 재즈 앨범이 들려있었다.
"선물이에요. 제가 예전에 즐겨 듣던..."
은희도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저도요. 이거... 제가 처음 쓴 시집이에요. 부끄러워서 아무도 안 보여줬는데..."
둘은 서로의 선물을 교환했다. 그리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있잖아요."
루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제 깃발의 의미를 알 것 같아요. 그건 완벽한 무언가가 아니라... 우리의 불완전함을 받아들이는 용기였던 거죠."
은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용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것..."
창밖에서 갑자기 종소리가 울렸다. 둘은 창가로 다가갔다.
저 멀리 바다 위로 수많은 요트들이 항해하고 있었다. 그들의 하얀 돛이 마치 작은 깃발들처럼 나부꼈다.
"마르코 교수님은 어디로 가셨을까요?"
은희가 물었다.
"글쎄요. 어쩌면 다른 누군가의 아우성을 듣고 계실지도 모르죠."
루카가 웃으며 대답했다.
로비에서 체크아웃을 하는 동안, 은희는 마지막으로 노트를 펼쳐 한 구절을 적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휘날리는
불완전한 깃발이었다
서로의 아우성을 알아보는 순간
비로소 완벽해지는...'
"이제 진짜 작별인가요?"
루카가 물었다.
은희는 미소 지었다.
"아니요. 우리에겐 이제 서로의 깃발이 있잖아요. 언제든 흔들리면... 서로를 찾을 수 있을 거예요."
나폴리 공항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은희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포실리포 절벽이 보였다. 그리고 그 위로...
아니, 분명 착각일 테지만... 파란 코트 한 벌이 바람에 나부끼는 것 같았다.
택시가 모퉁이를 돌자 루카가 준 재즈 앨범이 가방에서 떨어졌다.
은희가 집어들어보니 앨범 속에 쪽지가 하나 들어있었다.
'완벽하지 않은 우리이기에
서로의 아우성이 될 수 있었다
이것은 소리 없는 동행이었다
- 당신의 불완전한 친구로부터'
은희는 웃으며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폴리의 하늘은 여전히 푸르렀고,
어딘가에서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끝]
#ref.:
https://sosohantry.tistory.com/entry/Poem-유치환-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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