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ort story) 달빛 아래의 전장: 포도와 잎사귀처럼

<달빛 아래의 전장: 포도와 잎사귀처럼>

 

1장: 눈부신 스포트라이트 아래에서

"오늘도 솔로 플레이하실 건가요, 하민 선수?"

유진의 말에 하민은 대답 대신 키보드를 더욱 세게 두드렸다. 연습실의 모니터 불빛이 그의 얼굴을 파랗게 물들였다. 롤드컵 개막식이 내일로 다가온 늦은 밤, 다른 팀원들은 이미 숙소로 돌아간 지 오래였다.

"전 먼저 들어가보겠습니다."

유진은 한숨을 내쉬며 문을 열었다. 그때 들려온 하민의 목소리는 의외로 진지했다.

"형, 우리가 여기까지 온 게... 제 솔로 플레이 덕분 아닌가요?"

유진은 잠시 문손잡이를 붙잡은 채 멈췄다. 맞는 말이었다. 하민의 천재적인 개인기가 아니었다면 'Moonlight Gaming'은 결코 롤드컵까지 올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롤드컵은 달라. 여긴 세계 최고의 팀들이 모이는 곳이야. 네 솔로 플레이만으로는..."

"제가 증명해 보이죠."

하민의 단호한 대답에 유진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문이 닫히고, 연습실에 홀로 남은 하민은 모니터 속 자신의 캐릭터를 바라보았다. 화면 속 챔피언은 마치 자신처럼 홀로 서 있었다.

다음 날, 롤드컵 개막식장은 전 세계 e스포츠 팬들의 함성으로 가득 찼다. 화려한 조명이 경기장을 수놓는 가운데, 해설자 사라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올해 롤드컵의 다크호스로 주목받는 Moonlight Gaming! 특히 미드 라이너 하민 선수의 활약이 기대되는데요..."

하민은 무대에 오르며 관중석을 둘러보았다. 수많은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는 가운데, 그의 눈에 들어온 건 맞은편에 서 있는 북미 팀 'Storm Knights'의 미드 라이너 알렉스였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준비하시죠, 하민 씨." 유진이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하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그가 그토록 꿈꾸던 세계 무대가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왜일까. 형형색색의 조명 아래 서 있는 지금, 그의 마음 한켠에는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2장: 개인주의와 팀워크의 충돌

"하민 선수! 도대체 뭐 하시는 거예요?"

조용하던 팀 음성채팅이 코치의 고함으로 가득 찼다. 경기 시작 15분 만에 Moonlight Gaming은 큰 격차로 밀리고 있었다. 하민의 무리한 솔로 플레이가 연달아 실패하면서다.

"제가 만회하겠습니다." 하민의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만회는 무슨... 아, 하민 선수 또 솔로 다이브하시는 거예요?"

그러나 이미 늦었다. 하민의 캐릭터는 적진 깊숙이 돌진했고, 순식간에 적팀의 집중 공격을 받아 쓰러졌다. 관중석에서는 한숨 소리가 들렸다.

"타임!" 유진이 외쳤다.

잠시 후 대기실. 팀원들의 표정은 굳어있었다. 특히 서포터를 맡은 민수의 얼굴이 어두웠다. 그는 내내 하민을 서포트하려 했지만, 매번 무시당했다.

"하민아." 유진이 입을 열었다. "우리는 팀이야. 네가 아무리 뛰어나도..."

"형도 봤잖아요." 하민이 말을 자르며 벌떡 일어났다. "상대 미드 라이너 알렉스가 얼마나 날뛰는지. 제가 막아야..."

"그래서 네가 혼자 다섯 명을 상대하겠다는 거야?"

침묵이 내려앉았다. 하민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의 눈앞에 첫 경기에서 승리의 미소를 짓던 알렉스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전 할 수 있어요."

"할 수 있다고? 지금 스코어보드 보이지 않아?" 코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대로라면 우린 16강에서 탈락이야."

하민은 대답 없이 밖으로 나갔다. 복도에서 마주친 알렉스가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지만, 하민은 모른 척 지나쳤다.

달빛이 내리비치는 경기장 밖. 하민은 홀로 벤치에 앉아 있었다. 문득 귓가에 사라의 해설이 울렸다.

"Moonlight Gaming의 하민 선수, 놀라운 개인기를 보여주고 있지만... 과연 이것이 팀의 승리로 이어질 수 있을까요?"

하민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저 달빛처럼 홀로 빛나고 싶었는데, 왜 이렇게 마음이 무거워지는 걸까.


3장: 포도넝쿨 아래의 대화

경기장 뒤편 작은 정원. 밤이 깊어갈수록 포도넝쿨 사이로 스며드는 달빛이 더욱 선명해졌다. 하민은 벤치에 홀로 앉아 핸드폰으로 오늘 경기 영상을 돌려보고 있었다.

"여기서 또 보네."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하민은 흠칫 놀랐다. 유진이었다. 팀 주장은 말없이 하민의 옆자리에 앉았다.

"형, 절 설교하러 온 거예요?"

"설교는 무슨." 유진이 피식 웃었다. "난 그냥 우리 팀의 천재 미드라이너가 왜 이렇게 풀이 죽어있나 보러 왔지."

침묵이 흘렀다. 포도넝쿨 사이로 바람이 지나가며 달빛이 일렁였다.

"사실... 무서워요."

하민의 뜻밖의 고백에 유진이 놀란 듯 쳐다보았다.

"내가 실수하면... 팀이 망할까 봐. 그래서 더 혼자 하려고 했나 봐요. 적어도 그럼 책임질 사람이 나 하나니까."

유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너도 참 웃기다.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오히려 더 큰 책임을 져버리는 게 말이 되나?"

"네?"

"네가 혼자 다 하려고 하니까, 우리는 오히려 더 불안해. 천재 미드라이너가 또 무슨 짓을 할지 몰라서 말이야." 유진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때였다. 포도넝쿨 위로 달빛이 환하게 비췄다. 하민은 문득 넝쿨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포도 하나하나가 제각각이면서도, 모두 같은 넝쿨에 매달려 있었다.

"형... 우리 팀이 좀 포도넝쿨 같지 않아요?"

"갑자기 시인이 됐네?" 유진이 킥킥거렸다.

"아니, 그게 아니라..." 하민도 따라 웃었다. "그냥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우리도 다들 개성 강한 선수들인데, 어쩌면 그게 우리의 장점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유진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네가 그런 생각을 하다니, 달빛이 사람을 확실히 낭만적으로 만드는가 보다."

두 사람은 한참을 웃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도시의 소음도, 내일의 경기에 대한 부담감도 잠시 잊은 채.

"근데 형... 저 포도 따먹으면 안 될까요? 갑자기 먹고 싶네."

"야! 그건 경기장 정원이잖아!"

"에이, 하나만요~"

"하민아!"

달빛 아래, 포도넝쿨 사이로 두 선수의 웃음소리가 퍼져나갔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팀워크의 시작이었을지도 모른다.

4장: 경기와 전략, 문화적 간극

"What's wrong with that guy?" 
알렉스가 관중석을 향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방금 전 하민의 공격적인 플레이로 Storm Knights가 큰 이득을 챙긴 직후였다.

"Stop showboating and focus on the game!" 
유진이 답답한 듯 소리쳤다. 의외로 영어가 유창했다.

"오, 주장님. 영어 실력이 수준급이신데요?" 민수가 놀란 듯 물었다.

"너희들 몰랐어? 난 미국에서 3년 살았..." 
유진의 말은 채 끝나기도 전에 끊겼다. 하민이 또다시 적진으로 돌진한 것이다.

"아니, 얘가 진짜!" 
유진이 헤드셋을 고쳐 쓰며 짜증을 냈다.

"Hey, your mid laner... 그는 항상 저렇게 공격적인가요?" 
알렉스가 킬을 성공시키고 나서 채팅창에 물었다.

"항상 그런 건 아닌데..." 유진이 한숨을 쉬었다. "오늘따라 더 심하네요."

"Interesting. 在韓國... 아, sorry. In Korea, all mid laners like this?"

"당신도 한국어 하시네요?" 이번엔 유진이 놀랄 차례였다.

"조금요. 제 여자친구가 한국인이에요." 알렉스가 웃으며 답했다.

순간 경기장이 조용해졌다. 모두가 하민을 쳐다보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적극적으로 공격하던 하민이 갑자기 움직임을 멈춘 것이다.

"하민아, 괜찮아?" 유진이 조심스레 물었다.

"...여자친구요?" 하민이 마이크에 대고 중얼거렸다.

"응? 아, 네. 작년 롤드컵 때 만났어요." 알렉스가 순수하게 답했다.

"작년에... 롤드컵..." 하민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그때였다. 

"트리플 킬!"

하민이 갑자기 폭발적인 플레이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마치 분노한 듯한 움직임이었다.

"어... 하민 선수? 갑자기 왜 저러세요?" 해설자 사라가 당황한 듯 물었다.

"아마도..." 유진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작년 롤드컵에서 탈락한 게 생각났나 보네요."

"아니요." 민수가 키득거리며 말했다. "우리 천재 미드라이너가 질투하는 것 같은데요?"

 

5장: 경기장을 넘어선 이해와 교감

경기가 끝나고 선수들이 모인 카페테리아. 하민과 알렉스가 마주 앉아있었다.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So... 네 여자친구는 어떻게..." 하민이 더듬더듬 영어로 물었다.

"아, 한국말로 해도 돼요." 알렉스가 웃으며 답했다. "사실... 제가 김치찌개 먹다가 맨입에 고추를 씹은 걸 그녀가 도와줬어요."

"네?" 하민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작년 롤드컵 때요. 선수 식당에서." 알렉스가 회상하듯 말했다. "저는 빨간 걸 보고 토마토인 줄 알았거든요."

유진이 옆에서 푸훗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서 우리가 항상 말하잖아. 문화를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고."

"맞아요." 알렉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게임도 마찬가지죠. 서로의 플레이 스타일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게 중요한 것처럼요."

하민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의 솔로 플레이가 서양의 팀 중심 문화와 얼마나 충돌했는지 이제야 이해가 되는 듯했다.

"그런데..." 하민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고추는 어떻게 됐어요?"

"음..." 알렉스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날 바로 병원에 갔죠. 그리고 거기서 통역해준 게 지금의 여자친구예요."

"아..." 하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전 이제 병원에 가면 되는 건가요?"

"뭐라고요?" 알렉스가 놀란 듯 물었다.

"아니, 그게..." 하민이 더듬거렸다. "저도 여자친구가..."

"하하하!" 카페테리아가 웃음바다가 됐다.

 

6장: 깊은 밤에 찾아온 깨달음

새벽 3시. 하민은 여전히 연습실에서 솔로 랭크 게임을 하고 있었다. 화면 속에서 그의 캐릭터가 혼자 적진을 헤집고 다녔다.

"아직도 안 자?" 
사라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네? 해설위원님은 왜..."

"난 새벽에 커피를 마시러 왔지." 사라가 웃으며 말했다. "근데 불이 켜져 있길래."

하민은 잠시 말이 없었다. 화면 속에서 그의 캐릭터가 또다시 적에게 당하고 있었다.

"알렉스의 여자친구 이야기 때문에 그래?" 
사라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아니요!" 하민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전 그냥... 더 강해지고 싶어서..."

"흠..." 사라가 모니터를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이상하네."

"네?"

"네가 지금 하는 게임... 솔로 랭크 아냐? 근데 왜 자꾸 팀 게임처럼 하려고 해?"

하민은 흠칫 놀랐다. 방금 전까지 그가 하던 플레이를 다시 돌아보니, 정말 그랬다. 혼자서도 팀원들의 위치를 의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상하죠?" 하민이 쑥스러운 듯 웃었다. "전 원래 솔로 플레이만 고집했는데..."

"그게 바로 성장이야." 사라가 따뜻하게 미소 지었다. "네가 모르는 사이에, 이미 넌 팀 플레이어가 되어가고 있는 거지."

그때였다. 게임에서 승리 화면이 떴다. 하민은 깜짝 놀랐다. 자신도 모르게 팀원들과 호흡을 맞추며 플레이를 한 것이다.

"이제 알겠어요." 하민이 천천히 말했다. "제가 왜 이렇게 밤늦게까지 게임을 하고 있었는지..."

"왜?"

"전... 제 모습이 변하는 게 두려웠나 봐요. 하지만 이제는..."

사라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창 밖으로 달빛이 은은하게 비치고 있었다.

 

7장: 마지막 결전, 팀으로서의 승리

롤드컵 결승전. Moonlight Gaming과 Storm Knights의 운명의 대결이었다.

"자, 다들 준비됐지?" 
유진이 팀원들을 둘러보았다.

"네... 근데 잠깐만요." 하민이 갑자기 일어섰다. "다들 이거 하나씩 드세요."

그가 내민 것은 작은 비닐봉지. 안에는 새빨간 것이 들어있었다.

"이게 뭔가요?" 민수가 조심스레 집어들었다.

"고추요." 하민이 진지하게 답했다. "알렉스처럼 우리도 이걸 먹고..."

"야! 미쳤어?" 유진이 소리쳤다. "지금 경기 직전인데!"

"농담이에요, 농담." 하민이 웃으며 비닐봉지를 치웠다. "사탕이에요, 사탕."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경기가 시작되고, 처음으로 하민과 알렉스가 미드 라인에서 마주쳤다. 

"Ready?" 알렉스가 채팅을 보냈다.

하민은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 "Yes. But..."

"But?"

"이긴 사람이 진 사람한테 김치찌개 사주는 거 어때요?"

알렉스가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그러더니 채팅창에 웃는 이모티콘을 보냈다.

"Deal. But 이번엔 고추 빼고요."

 

8장: 달빛 아래 익어가는 순간들

결승전이 끝나고, 선수들은 다시 그 포도넝쿨 아래 모였다. 이번엔 하민이 정말로 포도 하나를 따서 먹고 있었다.

"야! 진짜로 따먹었어?" 유진이 놀라서 소리쳤다.

"괜찮아요." 하민이 씩 웃었다. "우리가 우승했으니까, 축하파티용으로..."

"그래도 그건 경기장 정원의..."

"Actually..." 알렉스가 끼어들었다. "그거 제가 심은 거예요."

모두가 깜짝 놀라 알렉스를 쳐다보았다.

"작년에 여자친구가 심자고 해서..." 알렉스가 쑥스러운 듯 말했다. "한국에서 가져온 포도나무였어요."

하민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달빛이 포도넝쿨 사이로 스며들며 아름다운 그림자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하민이 문득 깨달은 듯 말했다. "우리도 이렇게 자란 거네요. 처음엔 제각각이었지만..."

"이제는 하나의 팀으로." 유진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민수가 덧붙였다.

"더 멋진 팀이 될 거예요." 하민이 마지막 포도 알을 따며 말했다. "마치 이 포도넝쿨처럼요."

달빛은 여전히 그들 위에서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 빛은 혼자만의 것이 아닌, 모두의 것이 되어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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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전의 순간, 달빛 속 집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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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 장만영, <달, 포도, 잎사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