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너머, 기억의 경계선>
### 제1장: 도시의 빈 껍데기
2035년의 도시, 이름 없는 빌딩들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었고, 그곳을 덮은 네온 불빛과 홀로그램 광고는 끊임없이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거리 곳곳에서 AI 비서들이 흐릿한 홀로그램 형태로 떠다니며 사람들의 대화를 이어받고, 메신저 앱에서 나온 데이터 기반의 감정 분석을 통해 이들이 원하는 정보를 즉각 제공했다. 사람들은 편리함에 안주하며 감정 조작 장치의 도움을 받아 인공적인 안정감을 유지했다. 그러나 이 도시에선 진정한 감정은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지우는 고급스러운 오피스 빌딩의 최상층 사무실에서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루를 마무리한 그의 손끝은 늘 그렇듯 감정 조작 장치로 향했다. 금속성의 차가운 디스크가 그의 손가락 끝을 스치자, 마치 정해진 의식처럼 안도감이 가슴을 채웠다. 오늘도 그저 외부 자극에 따라 맞춰진 기쁨과 피로감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이 장치는 지우가 몇 해 전부터 의존하던 것이었다. 그는 광고 캠페인의 완벽함을 위해 수많은 감정을 분석하고 조작할 줄 알았지만, 정작 자신의 감정은 제어하지 못했다.
사무실은 고요했지만, 창문 너머로 들려오는 도시의 소음은 밤새 사라지지 않았다. 그 속에서 지우는 혼자였다. 그런 그에게 다가온 변화의 불씨는 예상치 못한 순간에 나타났다. 회사 이메일로 전송된 뉴스 보고서가 바로 그것이었다. '감정 복원 기술, 시골 마을에서의 획기적 발견.' 그는 익숙한 이름을 발견하고 시선을 멈췄다. 다윤. 그 이름은 한때 그의 세상을 흔들던 이름이었다. 그녀와의 마지막 기억은 끊임없는 논쟁과 씁쓸한 작별로 얼룩져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마음속에서 살아 움직였다.
지우는 신경질적으로 모니터를 꺼버렸다. 감정 조작 장치가 제공하는 가짜 위로는 갑작스레 무색해졌고, 그곳에 남아 있는 것은 깊은 고독이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다윤과 마주해야 할 이유들이 파고들었다. 그가 지금껏 애써 외면했던 것들, 기억 속 묻어둔 상처와 미완의 감정들이 솟아올랐다.
“다윤... 넌 지금 어떤 선택을 하고 있는 거지?” 지우는 스스로에게 속삭이며 창밖을 보았다. 빛이 내리는 도시의 거리에서, 마치 어딘가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그를 부르는 것만 같았다.
### 제2장: 시골 마을의 비밀
지우가 도착한 시골 마을은 도시와는 전혀 다른 세계였다. 아스팔트 도로가 끝나는 지점에서 시작된 흙길은 무성한 숲을 지나 마을 중심으로 이어졌다. 그곳의 하늘은 더 이상 인공 불빛에 가려져 있지 않았다. 낮에는 햇빛이 비추고 밤에는 별들이 찬란하게 빛났다. 그러나 이 평화로운 풍경에는 숨겨진 긴장감이 감돌았다.
마을은 고요했지만, 거리를 걷는 이들의 눈빛은 어딘가 경계심을 띠고 있었다. 지우는 처음으로 자신이 고향과 같은 익숙함을 느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무엇인가가 잘못되었다는 감각도 빠르게 자리잡았다. 사람들은 낮에는 친절했지만, 밤이 되면 집 안으로 숨어들어 문을 걸어잠갔다. 밤의 어둠 속에서 멀리서 들려오는 정체불명의 속삭임은 마을을 감싼 숲에서 시작되는 듯했다.
지우는 다윤의 연구소를 찾아 마을을 걸었다. 연구소는 마을 끝자락에 자리한 작은 집이었지만, 내부는 첨단 장비와 데이터 스크린들로 가득 차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다윤은 여러 장비들에 집중하며 작업 중이었다. 그녀가 고개를 들고 지우를 본 순간, 눈빛 속에 일순간 번뜩이는 감정이 있었다. 그것은 경계, 놀라움, 그리고 잊고 있던 무언가가 되살아난 듯한 복합적인 감정이었다.
“여기까지 오다니... 예상치 못했어.” 다윤은 차분하게 말을 건넸지만, 눈빛에는 흔들림이 서려 있었다.
지우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옛날 기억이 파고들었다. 행복했던 순간들과 그 이후 모든 것이 뒤틀려버린 날들. “네가 나를 여기로 부른 거나 다름없어. 네 연구에 대해 듣고 나서부터 그랬어.”
다윤은 짧게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연구소의 냉정한 조명이 그녀의 피곤한 얼굴을 비췄다. “네가 찾고 있는 게 치유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지우. 내가 하고 있는 일은 치유가 아니야. 모든 게 무너질 수도 있는 위험을 안고 있어.”
그 순간 연구소의 벽 너머로 마을의 어두운 숲에서 들려오는 낮은 울음소리가 들렸다. 지우는 그 소리에 몸이 얼어붙었다. 다윤은 그런 지우를 바라보며 눈을 좁혔다. “여긴 단순한 시골 마을이 아니야. 이제 너도 알게 될 거야.”
### 제3장: 다윤의 경고와 속삭임
다음 날 아침, 지우는 연구소에서 다윤과 마주 앉아 본격적인 대화를 시작했다. 창문 너머로는 햇살이 스며들어 작은 먼지 입자들이 반짝였다. 그러나 방 안의 공기는 마냥 따뜻하지 않았다. 다윤의 눈빛은 여전히 단호했고, 말없이 쏟아지는 질문을 막고자 하는 듯했다.
“네가 하는 연구가 기억을 복원한다고 했지. 하지만 왜 그게 위험한 거지?” 지우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는 답을 원하면서도 동시에 두려웠다. 다윤은 손끝으로 서류 몇 장을 넘기며 깊은 숨을 내쉬었다.
“기억은 단순히 하나의 장면이 아니야, 지우. 감정과 함께 얽혀있고, 그것이 사람을 정의해. 내가 이 연구를 시작했을 때는 상처받은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었어.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깨달았지. 우리가 기억을 되살리면, 그 기억이 얼마나 진짜인지를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는 걸.” 그녀는 화면에 떠 있는 데이터 그래프를 가리켰다. “복원된 기억들은 가끔 실제보다 더 강렬하게 남아, 사람을 잠식할 수 있어.”
지우는 말을 잃고 다윤을 응시했다. 마을 밖 숲에서 들려오던 속삭임이 문득 떠올랐다. 그것은 단순한 자연의 소리가 아니었다. 지우는 의자에 깊이 몸을 기댔다. 그의 머릿속에는 자신이 겪었던 오래된 아픔과 그 아픔을 덮어주었던 감정 조작 장치의 가짜 위로가 교차했다.
“그러니까, 네 연구는 치유와 파괴 사이에 있는 거군.” 지우의 말에 다윤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그리고 내가 두려운 건 그 경계를 넘어서는 순간이야.”
그 순간, 연구소의 창문을 통해 한나의 모습이 비쳤다. 그녀는 다윤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마을의 의사였다. 한나는 짙은 눈썹을 찌푸린 채 연구소로 들어섰다. 그녀의 얼굴에는 어떤 결심이 서려 있었다.
“지우, 여길 떠나.” 한나는 명령하듯 말했다. “다윤의 연구는 더 이상 안전하지 않아. 너까지 위험에 빠질 수 있어.” 한나의 눈에는 다윤에 대한 걱정과 경고가 섞여 있었다. 그녀는 다윤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내가 말했잖아. 연구를 멈추라고.”
다윤은 입술을 꼭 다물었다. 침묵이 방 안을 무겁게 누르는 듯했다. 지우는 한나와 다윤 사이에 흐르는 긴장감을 느끼며 혼란스러웠다. 그가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가 이 마을에 숨겨져 있었다.
그러나 그때였다. 연구소 밖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비명과 함께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였다. 지우는 본능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한나는 창밖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이제 시작된 거야...”
### 제4장: 한나의 내적 갈등
한나는 연구소를 빠져나와 마을 중심으로 향했다. 그녀의 가슴은 마치 돌을 얹어둔 것처럼 무거웠다. 기억이 복원된 사람들은 처음엔 감정의 파도를 타고 행복해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감정은 억제할 수 없는 혼란과 고통으로 변질되곤 했다. 한나는 그것을 직접 목격했다. 어린 시절 잃어버린 동생의 기억이 다윤의 연구로 인해 되살아났을 때, 그녀는 잠시 기쁨을 느꼈지만 곧 불안과 괴로움이 몰려왔다. 그 기억은 완전하지 않았고, 잘못된 부분은 점점 그녀의 마음을 잠식했다.
“이 연구는 사람의 마음을 살릴 수도 있지만, 그보다 더 큰 무언가를 잃게 만들 수도 있어.” 한나는 자신에게 중얼거리며 발걸음을 멈췄다. 그녀의 눈앞에는 지우와 다윤이 있었다.
지우는 한나의 혼란과 두려움을 읽어낼 수 있었다. “한나,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왜 이 마을 사람들이 이렇게 두려워하지?”
한나는 한순간 망설였지만, 마침내 입을 열었다. “감정 복원은 단순한 기억의 회복이 아니라, 그 기억이 사람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에 달렸어. 나의 경우, 동생의 기억이 나를 잠식하려 했어.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는 나 자신을 잃을 뻔했지.”
그 순간 다윤이 나타나 그들의 대화를 막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단호했지만, 두려움이 숨겨져 있었다. “지우, 이제 알겠어? 네가 찾아온 답은 쉽지 않을 거야.”
마을의 불길한 울림은 더욱 짙어지고 있었다. 멀리서 마을 사람들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감정의 파편들이 그들의 존재를 지배하려는 듯한 소리였다.
### 제5장: 지호의 계획과 고백
어둠이 마을을 덮었을 때, 지우는 연구소에서 나오며 차가운 밤공기를 들이마셨다. 그 순간, 먼 숲길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지우는 본능적으로 몸을 돌려 그곳을 바라봤다. 낯익은 얼굴이 있었다. 지호, 그가 어둠 속에서 서서히 걸어나오고 있었다. 도시에 있던 그의 차가운 눈빛은 마을의 어둠 속에서도 변함이 없었다. 지호는 지우를 향해 서서히 다가와 작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지우, 예상 밖이군. 네가 이곳에 올 줄은 몰랐어.” 지호의 목소리는 낮고 위협적이었다. 그에게는 단순한 직장 동료 이상의 무언가가 있었다. 지우는 놀람과 불신이 교차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여기까지 왜 온 거지, 지호? 이 마을과 다윤의 연구는 네가 알 법한 영역이 아니잖아.”
지호는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넌 아직도 이해를 못하겠지. 내겐 도시에서 얻을 수 없는 무언가가 필요해. 그게 바로 기억이야. 잃어버린 과거의 조각들을 되찾고, 그것을 통해 새로운 기회를 만들겠다는 의지가.”
지우는 지호의 말 속에 담긴 감정의 깊이를 깨닫고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지호가 단순히 성공과 권력을 추구하는 야심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에게는 가슴 아픈 상실의 기억이 있었고, 그 기억을 되살려야만 현재의 자신이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절박함이 숨어 있었다.
“네가 잃어버린 게 무엇이든, 그걸 되찾는다고 해서 모든 게 해결되진 않아. 다윤이 경고했어. 복원된 기억은 언제나 진짜가 아니야.” 지우의 말에 지호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의 눈동자는 복잡한 감정들로 뒤섞였다.
“진짜든 아니든 상관없어. 내가 느끼는 고통보다 나은 거라면.” 지호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러면서 다윤의 연구소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다윤은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가지고 있어. 그리고 그것이 내 손에 들어오면,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두렵지 않을 거야.”
그 순간, 지우는 지호의 진짜 의도를 깨달았다. 그는 단순히 자신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니라, 그 기술을 이용해 더 큰 야망을 이루려 하고 있었다. 지우는 가슴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불안감을 억누르며 말했다. “그걸로 무엇을 할 건데? 이 기술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면서도, 그걸 이용하겠다고?”
지호는 무언가를 결심한 눈빛으로 지우를 응시했다. “기회가 왔을 때 잡지 않는다면, 그건 패배야. 그리고 난 두 번 다시 지지 않을 거야.”
그 순간, 멀리서 다윤이 나타났다. 그녀는 둘의 대화를 눈치채고 달려왔다. 다윤의 눈에는 분노와 두려움이 뒤섞여 있었다. “지호, 멈춰. 이 기술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해. 잘못 다루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어.”
지호는 한 번도 다윤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본 적 없는 차가운 얼굴로 답했다. “난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서 살아왔어. 이제는 내가 이겨야 할 때야.”
지우는 다윤과 지호 사이에 선 채 망설임이 가득한 눈빛을 보냈다. 한나의 경고, 다윤의 두려움, 지호의 절박함이 모두 그의 마음을 짓눌렀다. 그 순간, 연구소 안에서 경고음을 알리는 불빛이 깜박이기 시작했다.
### 제6장: 기억 복원 기술의 부작용
연구소의 경고음이 울리자 다윤은 단숨에 모니터로 달려갔다. 화면에는 데이터가 급격히 흔들리며 이상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이미 시작됐어...” 다윤은 속삭이듯 말했다.
다윤은 떨리는 손으로 모니터의 데이터를 확인했다. 그래프는 심각한 변화를 나타내며 요동치고 있었다. 연구소의 장비들은 연이어 경고음을 내뱉었고, 실험체들의 감정 데이터가 불안정하게 움직였다. 마을 외곽에서는 속삭임 같은 낮은 울음소리가 점점 선명해지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바람 소리가 아니었다. 감정의 파편들이 얽힌 소리, 복원된 기억 속에서 방황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비명에 가까운 것이었다.
지우는 연구소 안의 긴장감에 얼어붙었다. 그는 다윤의 옆에 서서 화면 속 깜빡이는 데이터와 비명을 지르는 장비들을 보았다. 다윤은 다급하게 데이터를 분석하며 말했다. “이건 실험이 너무 깊어졌다는 신호야. 사람들의 기억이 잘못된 방식으로 되살아나고 있어.”
그 순간, 지호는 무표정한 얼굴로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섰다. “그래서 뭐, 이대로 끝내자고? 이 모든 게 네 경고 한 마디로 중단될 수 있는 줄 알아?” 그의 목소리에는 냉정함과 함께 다급함이 섞여 있었다. 지호는 다윤의 연구를 이용해 무엇을 하려는지 드러내고 있었다. 그에게는 기억을 되찾아야 할 이유가 있었고, 그것은 그의 존재 이유와 같았다.
다윤은 눈을 들어 지호를 응시했다. “이 기술은 단순히 잃어버린 걸 되찾는 게 아니야. 그 기억이 지금의 네 정신을 얼마나 왜곡시킬지 아무도 몰라. 이미 마을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어.” 그녀는 창밖을 가리켰다. 마을 한가운데에서는 몇몇 사람들이 혼란에 빠져 있었다. 이들은 마치 과거의 잃어버린 순간 속에서 살아가는 것처럼 현실과 분리되어 있었다. 그들의 눈은 공허하게 먼 곳을 응시했고, 입술은 무언가를 중얼거리며 꿈틀거렸다.
한나는 그 장면을 보고 놀란 얼굴로 다윤에게 달려왔다. “이대로 놔두면 마을 전체가 무너질 수도 있어. 다윤, 네가 결단을 내려야 해.”
지우는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를 느끼며 다윤을 보았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기억과 감정, 그리고 이 기술이 가져올 파급력을 두고 상충하는 생각이 휘몰아쳤다. 과거의 아픔을 없앨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지만, 그것이 새로운 고통을 가져올 위험이 있었다.
지호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다윤의 연구실 책상 위에 놓인 감정 복원 장치에 손을 뻗었다. “이제 내 차례야.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거야.” 다윤은 지호의 손목을 잡고 막으려 했지만, 지호는 빠르게 장치를 움켜쥐었다. 그 순간 연구소의 조명이 깜박였고, 모니터 화면은 오류 메시지로 가득 찼다.
지우는 그 광경을 보며 결심했다. 그는 지호를 제지하기 위해 몸을 던졌고, 두 사람은 거친 몸싸움을 벌였다. 장치는 이리저리 휘둘렸고, 그 충돌로 인해 경고음은 더욱 날카롭게 울렸다.
### 제7장: 선택의 갈림길
다윤은 격렬한 싸움 속에서 연구소가 흔들리는 소리와 함께 시스템이 위험하다는 메시지를 보았다. 지우와 지호의 몸이 부딪히는 소리, 한나의 외침, 경고음이 혼재한 혼란 속에서 다윤은 스스로에게 한 가지 결심을 내려야 했다. 이 모든 것을 끝낼 방법이 필요했다.
그녀는 연구소의 메인 컴퓨터 앞에 서서 손가락을 떨며 키보드를 두드렸다. 이 순간이 모든 것을 결정할 순간이었다.
다윤은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시스템의 비상 차단 절차를 실행할 준비를 했다. 손가락은 땀에 젖어 있었고, 화면에 떠오르는 수많은 코드들은 그녀의 시야를 압박했다. 연구소 안은 지우와 지호의 격렬한 몸싸움과 한나의 목소리로 가득 찼다.
“멈춰! 다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몰라!” 한나가 외쳤지만 다윤의 눈은 한 곳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그녀는 시스템 종료 코드를 입력하며 마지막으로 지우를 바라봤다. 지우의 얼굴에는 두려움과 결단이 동시에 떠올라 있었다. 그도 알았다. 이 순간에 다윤이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모두가 위험하다는 것을.
지호는 장치를 손에 쥐고 지우를 밀쳐내고 있었다. “내게 선택권이 있어, 다윤. 네가 그걸 없애버리면 난 아무것도 남지 않아!” 그의 목소리에는 절박함이 섞여 있었다. 지호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그 역시 자신의 고통을 감추기 위해 지금까지 모든 걸 걸어온 것이다.
다윤은 깊은 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 그녀는 눈을 떴을 때, 화면을 바라보며 손을 움직였다. “미안해, 지호. 하지만 이건 우리 모두를 위해서야.” 그녀는 코드 입력을 끝내고 시스템을 비상 종료시켰다. 연구소 안의 장비들은 모두 멈춰섰고, 경고음도 차츰 잦아들었다.
그 순간, 지호는 눈을 크게 뜨고 장치를 보았다. 장치는 빛을 잃고 차갑게 식어갔다. 그의 손가락은 그것을 쥐고 있었지만, 이제 더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지호의 표정은 절망으로 일그러졌다. “이제 다 끝났어...” 그의 목소리는 마치 무너진 아이의 외침 같았다.
### 제8장: 잊혀진 기억 속 희미한 감정
연구소의 혼란이 잦아들며 마을은 서서히 고요를 되찾았다. 지우는 숨을 고르며 쓰러져 있는 지호를 내려다봤다. 지호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그는 과거의 기억을 되살려 잃어버린 가족을 찾고자 했지만, 그것이 진정한 구원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지호...” 지우는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려 했지만, 지호는 고개를 떨군 채 반응하지 않았다. 다윤은 그 모습을 보고 차분히 다가갔다. 그녀는 장치를 내려놓고 한 발짝 앞으로 다가갔다. “기억은 우리의 일부야.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수 없어.”
지우는 다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마침내 자신의 상처를 직시하며 기억을 복원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기억은 그가 살아온 모든 순간의 증거이자 앞으로의 선택을 이끄는 원동력이었다.
다윤은 지우의 눈을 보며 말없이 미소 지었다. 그 순간, 지우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들은 함께 연구소 바깥으로 나가 밝아오는 하늘을 바라봤다. 어둠이 걷히는 마을에는 새로운 시작의 조짐이 있었다. 지우는 과거의 상처가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희미하게 남아 있는 감정 속에서 무언가를 깨달았다. 그것은 인간이 잊혀지지 않는 기억 속에서 찾는 희미한 따뜻함, 그리고 다시 시작할 힘이었다.
그렇게 지우는 자신의 길을 선택했고, 다윤도 연구를 완전히 봉인하기로 결심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선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몰랐지만, 그 순간만큼은 서로를 이해하고 있었다. 마을은 다시 평화를 되찾았고, 지우는 어딘가 깊숙한 곳에서 희미하게 느껴지는 감정을 안고 있었다.
그 감정은 진정한 행복의 씨앗이 될 수도, 새로운 아픔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지우는 그 감정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이 진짜임을 깨달았다.
### 에필로그: 새로운 시작의 희미한 빛
며칠 후, 마을은 평온을 되찾은 듯 보였다. 사람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고, 감정 복원 기술의 기억은 마을의 깊숙한 비밀로 남게 되었다. 연구소는 이제 불이 꺼진 채로 조용히 서 있었다. 다윤은 연구소 문을 마지막으로 잠그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안도와 슬픔이 뒤섞여 있었다.
지우는 마을 입구에서 다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과거의 고통과는 다른 결단력이 담겨 있었다. 다윤이 다가오자 지우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제 어딘가로 떠날 거야. 나만의 방식으로 새로운 시작을 찾고 싶어.”
다윤은 그를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마음 속에서도 한 가지 결심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나도 내 방식으로 책임을 다할 거야. 이 기술이 다시는 잘못된 방향으로 사용되지 않도록.”
그들은 서로의 손을 잠시 맞잡았다. 그 속에는 복잡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미완의 과거, 치유되지 않은 상처, 그리고 작별의 의미가 어우러진 순간이었다.
지우는 다윤에게서 천천히 손을 놓고 한 발짝 물러섰다. “언젠가 다시 만나겠지. 그때는 웃으면서 말할 수 있을 거야. 우리가 살아왔던 시간에 대해.”
다윤은 옅은 미소를 띠며 답했다. “그래, 그럴 거야.”
지우는 걸음을 옮기며 마을을 떠나기 시작했다. 바람이 살며시 불어와 그의 머리칼을 흩날렸다. 멀리서 떠오르는 아침 해가 마을을 감싸며 새로운 빛을 비추고 있었다. 그 빛 속에서 지우는 마음 속 깊이 남아 있는 희미한 감정을 느꼈다. 그것은 아픔과 기쁨이 혼재된, 진짜 살아있다는 증거였다.
마을에서는 다윤이 연구를 봉인한 이후 다시는 기술이 언급되지 않았다. 그러나 지우와 다윤이 선택한 그 날의 결심은 마을 사람들의 기억에 희미하게 남아, 앞으로 그들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에 대한 경고가 되었다.
그리고 먼 도시의 하늘 아래, 지우는 처음으로 자유롭게 웃을 수 있었다. 비록 모든 기억이 그대로 남아 있진 않더라도, 그는 앞으로 나아가는 힘을 찾은 것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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