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Writing) 184

Short story) 남도의 길을 걷는 나그네, 수미

# 1장: 서막 - 떠나는 수미 "아, 진짜 미치겠네."  수미는 휴대폰을 가방 깊숙이 집어넣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마지막으로 걸려온 전화는 회사 동료였다. 갑자기 사표를 던지고 떠난다는 그녀를 걱정하는 목소리였지만, 귀에는 그저 잔소리로만 들렸다. "수미야, 너 정말 괜찮은 거 맞아? 그래도 우리 회사가..." "아니, 전 정말 괜찮아요. 오히려 지금이 제일 좋네요." 마지막 통화를 끝내고 수미는 어깨에 걸친 낡은 배낭을 고쳐 맸다. 이 배낭은 대학생 때 산 것으로, 지난 10년간 옷장 구석에서 먼지만 뒤집어쓰고 있었다. 터미널에 도착하자 방송이 울려 퍼졌다. "남도행 버스 곧 출발합니다." 창가에 기대앉은 수미는 피식 웃었다. 사람들은 다들 미쳤다고 했다. 연봉 좋은 회사를 때려치우고, 남도의 시골길..

Short story) 가을의 기도

1.가을의 첫 기도퇴근길 공원의 가로등이 하나 둘 켜지기 시작했다. 정현은 낙엽이 쌓인 벤치에 앉아 깊어가는 저녁을 바라보았다. 며칠 전부터 불어오는 가을바람이 그의 뺨을 스쳤다. 코끝에 스치는 바람은 아직 차갑지 않았지만, 여름의 끝자락이 서서히 멀어져 가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정현의 입술 사이로 작은 속삭임이 새어 나왔다. 그것은 기도라기보다는 다짐에 가까웠다. 유리와 헤어진 지 육 개월, 계절이 한 바퀴를 돌아 다시 그때의 계절로 돌아왔다. 봄부터 여름까지는 그저 시간이 흘러가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이제 가을이 오고, 그녀와의 추억이 가득했던 이 계절을 마주하자 가슴 한켠이 무거워졌다. 벤치 옆으로 노란 은행잎 하나가 떨어졌다. 정현은 그 잎을 주워들었다. 작년 ..

Short story) 푸른 달빛 아래, 맨시티 팬 루크의 여정

## 1장: 달빛 아래의 경기장 에티하드 스타디움의 밤은 고요했다. 푸른 달빛이 텅 빈 경기장을 비추는 가운데, 한 남자가 울타리 너머로 경기장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루크. 목에 걸린 하늘색 맨시티 머플러가 차가운 밤바람에 나부꼈다. "이런 때 보안요원이라도 마주치면 대형사고겠는데..." 루크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피식 웃었다. 한밤중에 경기장 앞에서 서성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의심스러워 보일 터였다. 하지만 그는 이 시간, 이 장소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이야기가 있었다. 경기장의 푸른 잔디가 달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났다. 마치 바다처럼 잔잔히 물결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루크는 주머니에서 오래된 티켓 한 장을 꺼내들었다. 20년도 더 된 티켓이었지만, 그는 이 티켓을 늘 지갑 속에 간직하고..

Short story) 나폴리에서 흔들리는 깃발과 사라진 아우성

# 1장: "푸른 해원으로의 초대" - 나폴리에서 시작된 여정 은희는 나폴리 중앙역에 도착하자마자 자신의 여행가방에서 노트 하나를 꺼내들었다. 유치환의 '깃발'이 적힌 그 노트는 이미 수십 번을 읽어 귀퉁이가 접혀있었다.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그녀는 중얼거리다 멈췄다. 왜 하필 나폴리일까? 스무 살의 문학도가 선택한 이 도시는 너무나도 멀고, 더없이 낯설었다. "시뇨리나! 택시 타실래요?"  귀에 익숙하지 않은 이탈리아어가 날아들었다. 은희는 고개를 저었다. 구글 맵으로 찾아본 호스텔까지는 걸어갈 수 있는 거리였다. 그녀는 이어폰을 꽂고 걷기 시작했다.  첫 발걸음부터 나폴리는 은희의 상상과 달랐다. 인스타그램에서 본 낭만적인 골목길 대신, 그래피티로 뒤덮인 지저분한 벽과 귀청이 터질 듯한 ..

Short story) 그 먼 나라를 향한 여정

1. 이상향을 꿈꾸다"어머니, 그 먼 나라가 어디에 있을까요?"어느 늦은 오후, 난 소파에 엎드린 채로 푸념을 늘어놓았다. 어머니는 한참 열중하던 뜨개질을 잠시 멈추고, 익숙한 미소로 날 바라보며 대답했다. “멀긴, 어디 멀리 있겠니? 우리 동네 슈퍼 끝에 있잖아. 아줌마 사는 집 바로 옆.”“아니, 엄마, 그런 슈퍼 얘기가 아니에요.” 난 한숨을 쉬며 다시 말했다. "아무도 날 방해하지 않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곳이요. 아, 상사도 없고, 일도 없고, 그냥 마음이 편안해지는 그런 곳… 그런 나라요." 그러자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너, 혹시 비둘기 키워본 적 있어?”비둘기라니. 난 잠깐 어리둥절했지만 어머니는 진지했다. “그 먼 나라에 가면 비둘기를 키우면서 사는 거야. ..

Short story) 여름 새벽, 빛을 잇는 전선

## 1. 겨울 밤의 빛 "하진 씨, 이번에도 야간 근무예요?" 당직실 문을 열자 김수현이 장난스럽게 물었다. 하진은 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작업복을 꺼내 입었다. 그의 몸에 밴 전선 냄새가 어둠 속에서 더욱 진하게 느껴졌다. "또 누군가의 밤을 밝혀주러 가시나 봐요." "네가 날 놀리는 것 같은데." "아니에요, 진심으로 멋있다고 생각해요. 전기의 요정이랄까..." 하진은 픽 웃으며 안전모를 챙겼다. 그때 호출이 왔다. 도심 외곽의 한 아파트 단지에서 정전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출동하는 차 안에서 하진은 문득 3년 전 겨울밤을 떠올렸다. "죄송해요, 이런 늦은 시간에..." 처음 만난 그날, 님은 그렇게 말했었다. 한밤중에 갑자기 꺼진 전기 때문에 당황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던 그 사람. 하진은 그때..

Short story) 봉선화의 꽃물

1장: 장독간의 봉선화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여름날, 정우는 허름한 쪽방의 창가에 앉아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창밖으로 흘러내리는 빗물 사이로 어렴풋이 보이는 골목길 끝, 누군가의 담장 밑에서 붉게 피어난 봉선화 한 송이가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정우의 마음속에는 고향 장독간 앞에서 활짝 피어있던 봉선화들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아이고, 우리 정우야. 이리 와봐라. 봉선화 꽃물 들여줄게." 누님의 목소리가 마치 어제처럼 생생하게 들려왔다. 장독간 앞에 쪼그리고 앉아 정우의 손톱에 꽃잎을 하나하나 정성스레 올려놓던 누님의 손길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때는 몰랐다. 그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아니, 이게 뭐야! 남자가 무슨 꽃물을 들어!"  투정부리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났다. 하지..

Short story) 달빛 아래의 전장: 포도와 잎사귀처럼

1장: 눈부신 스포트라이트 아래에서 "오늘도 솔로 플레이하실 건가요, 하민 선수?" 유진의 말에 하민은 대답 대신 키보드를 더욱 세게 두드렸다. 연습실의 모니터 불빛이 그의 얼굴을 파랗게 물들였다. 롤드컵 개막식이 내일로 다가온 늦은 밤, 다른 팀원들은 이미 숙소로 돌아간 지 오래였다. "전 먼저 들어가보겠습니다." 유진은 한숨을 내쉬며 문을 열었다. 그때 들려온 하민의 목소리는 의외로 진지했다. "형, 우리가 여기까지 온 게... 제 솔로 플레이 덕분 아닌가요?" 유진은 잠시 문손잡이를 붙잡은 채 멈췄다. 맞는 말이었다. 하민의 천재적인 개인기가 아니었다면 'Moonlight Gaming'은 결코 롤드컵까지 올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롤드컵은 달라. 여긴 세계 최고의 팀들이 모이는 곳이야. ..

Short story) 파랑새가 머문 자리

1. 성북동의 첫 인상과 문화적 차이의 극복 과정 제임스 킴은 브루클린에서의 마지막 아침을 맞이하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다저스 구장이 보이는 아파트에서의 일상도 이제 추억이 될 터였다. 서울행 비행기를 타기 전, 그는 자신의 이름 'James Kim'이 한글로 쓰인 명함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제임스 킴'. 아직도 어색한 이름이었다. 성북동에 도착한 첫날, 그를 맞이한 것은 예상치 못한 문화 충격이었다. "어서 오세요, 제임스 씨!" 김진수 할아버지가 90도로 허리를 굽히며 인사를 건넸다. 당황한 제임스는 어정쩡하게 고개를 숙이다가 허리를 삐끗하고 말았다. "아, 아이고..." 그의 한국어 실력은 고작 '안녕하세요'와 '감사합니다' 정도였다. "손주며느리가 미국에서 공부했다네. 통역도 도와줄 거야."..

Short story) 해바라기의 비명

1장: 야곱의 유언 늦은 봄날의 햇살이 병실 창가에 걸린 얇은 커튼을 통과해 들어왔다. 엘리야는 병상에 누운 아버지 야곱의 마른 손을 잡고 있었다. 평생을 시인으로 살아온 아버지는 이제 마지막 시를 쓰듯 자신의 마지막 말을 준비하고 있었다. "엘리야야..." 야곱의 목소리는 바람에 흔들리는 보리이삭처럼 가늘었다. "내가 떠나면 무덤에 차가운 비석을 세우지 말아라. 대신 해바라기와 보리를 심어주렴. 그것이 내 마지막 소원이란다." 엘리야는 아버지의 말씀에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장례 방식과는 너무나도 다른 요청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아버지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며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아버지, 그건..." 엘리야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알고 있다, 아들아. 우리..